작성일 : 2015-10-26 (15:07)
[부안문화재답사-44] 사적 제409호 부안 백산성'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2130

 

부안 백산성ⓒ부안21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
[부안문화재답사-44] 사적 제409호 부안 백산성'

 

부안 백산성
사적 제409호  

부안읍에서 신태인 방향으로 4km지점, 군개다리(軍浦橋) 못미처 고부로 갈라지는 백산면 용계리 삼거리 오른편에 섬처럼 동진강을 굽어보며 서 있는 47.4m의 나지막한 산이 있다. 비록 낮은 산이지만 호남평야 한가운데 바가지를 엎어놓은 형국으로 홀로 솟아 있어 이곳에 오르면 김제, 만경, 금구, 태인, 정읍, 흥덕, 고부, 부안 등 4개 시‧군, 여덟 고을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이 산이 바로 동학농민혁명 때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군의 기포지(起泡地) 백산(白山)이다. 1894년 1월 11일 고부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과 농민군은 그 당시 고부군 마항에서 보름 가까이 머문 다음 백산으로 옮겨 사령부라 할 수 있는 창의도소(倡義都所)를 설치하고 창의문을 발표하니 인근 고을에서는 물론 전라도 거의 전역에서 농민군 3만여 명이 구름처럼 백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손에손에 죽창을 들고 있어서 서면 흰 옷 입은 농민군들로 온 산이 하얗게 뒤덮여 백산(白山)이 되었고, 앉으면 죽창의 숲이 솟아 죽산(竹山)이 되었다.

백산성은 산의 정상을 둘러쌓아 만든 성으로 바깥성을 포함한 4개의 단이 있으며, 토단 바깥으로는 말뚝을 박아 울타리를 둘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축성연대는 660∼663년 사이로 추정하며, 일부 훼손된 곳이 있으나 건물터, 옛 우물터, 삼국시대 토기조각들과 높이 3∼4m 정도의 토단이 잘 남아있다. 이곳 성터에서 1975년 11월 이영삼(李英三)씨에 의해 청동기시대 유물인 유병식(有柄式) 돌칼(용계리출토 돌칼) 완형품(完形品)이 습득되었고, 산 정상의 성책(城柵)을 두른 유적에서는 김해식 토기, 신라식토기가 수습되었다.

백산 바로 옆으로는 동진강이 흐르는데 예전에는 신태인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다. 삼국시대 당시에 백산은 바로 해안가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산은 동진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지키는 군사적 요새로 백제부흥운동 당시 백제 유민들이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모시고 나·당연합군과 최후의 항쟁을 벌였던 주류성과 연관되는 유적(백강白江싸움터)으로 비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 당시의 상황을 「일본서기」는 “일본수군 500척이 백강에 들어오자, ‘부여풍’이 백촌에 가서 일본수군을 맞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전라북도 문화재지」-전라북도>

/허철희huh@buan21.com

 

 

 

 

 

 

코멘트 쓰기
코멘트 쓰기


비밀번호 확인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