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03-30 (20:02)
[의병 김낙선 이야기] 거병 100년 만에 애국장 추서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3940

 

▲김낙선 의병 초상화(JTV ‘전북의 발견’에서 캡쳐)

“너그 할애비는 독립질 했다~ 이”
[의병 김낙선 이야기] 거병 100년 만에 애국장 추서

 

 

나이가 들수록 뿌리에 대한 관심은 커갑니다. 이것을 정체성 찾기라고 할 수도 있는데요, 필자는 가난한 집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직장 생활이며 이런 저런 일을 살피다가 나이 들어서야 뿌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이곳에서 살았을까? 우리는 왜 이리 가난하지?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셨을까? 등입니다. 그러나 의문만 가득할 뿐 뚜렷하게 알 수는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나라가 위급한 한말(韓末)에 총과 칼을 들고 일본군에 맞서 싸운 의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100여 년 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집안 자랑이기보다는 시대정신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 분을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하는 뜻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 널리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독립질을 했다는데

농촌 가정이 그렇겠지만, 논 세 마지기와 밭 일곱 마지기와 작은 초가집이 우리 집의 전 재산이었어요. 적은 논밭을 가꾸면서 사는데, 식구는 많았지요. 할머니, 부모님, 2남 6녀의 형제자매였습니다. 식구가 열하나인데 방 하나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다가 아버지는 방 하나를 의지가지로 달아냈고 반대편으로는 가대기를 쳐서 부엌을 대신했습니다.
중학교 물이라도 먹은 것은 형제자매 중 남자 둘뿐입니다. 학교라도 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공력이 컸지요. 남자 아이들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소신이 강한 분이셔서 베를 짜서 학비를 충당하곤 했어요. 당시 농촌은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제 밥벌이에 나서야 하는 때여서 배움에 눈뜨기가 쉽지 않았고 학교에 더 이상 진학하지 못해도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살던 때였습니다.
할머니(金姓女)는 고부 입석에서 시집 오셔서 동네에서는 ‘수락동떡’이라 불렀습니다. 곱게 늙으신 분으로 양같이 순한 분이라는 인상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들과 딸 남매를 키웠지요. 가난한 집에 살면서 밭일 등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한 번 하셨어요.

“너그 할애비는 독립질 했다~ 이”

어렸을 때 들은 얘기라 ‘독립질’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한 번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는 나의 관심에서 멀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흘러듣고 말았는데 지금 같으면 궁금해서라도 꼬치꼬치 캐물었을 테지요. 지나놓고 보니 무척 아쉽습니다. 할아버지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으면 관심이라도 가질 만한데 사진 한 장이 없었고 할아버지 흔적은 집안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있는 사진은 고모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초상화입니다.


▲김낙선 의사 기적비, 감교마을 앞 큰길가에 있음

할아버지 김낙선

할아버지 김낙선(金樂先, 본명 金洛振 1881~1925)은 상서면 가오리 우덕 마을에서 태어나서 혼인 후에는 상서면 감교리 감교 마을(웃감교)로 분가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사셨던 10대는 동학농민전쟁이 큰 풍파처럼 지나갔지만 부안 지역에는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상처와 깊은 슬픔이 남아있던 때였습니다.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잔악한 폭압 정치가 이어졌습니다.
한학자이며 서당 훈장을 했던 증조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할아버지는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졌고 동학농민전쟁의 영향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진 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역을 넘어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일본과 맞서는 항일투쟁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할아버지는 거병(擧兵) 전에 딸 하나와 출옥 후에 아들(김판술) 하나를 낳았고 산자락의 화전밭을 일구었습니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셨고 골수에 사무친 가난을 벗어나려고 담배 농사를 22년 동안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남긴 얘기는 많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의병이셨다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평소에 아래와 같은 말씀을 자주하셨지요.

그늘의 버섯같이 살지 말고,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마라.

서당을 열었던 증조할아버지는 아들이 넷인데 할아버지는 둘째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땅도 있고 어렵게 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으로 분가한 후에 의병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감교마을에 남아 있는 김낙선 의병의 옛집


▲김낙선 의병의 며느리 박순희(91세)


거병 100년 만에 애국장 추서

나는 정직한 농사를 강조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안 농고에 입학했습니다. 졸업한 후에는 교육청 공무원으로 출발했습니다. 열심히 근무하며 살았고 조상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고자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통신대 행정학과와 교원대 교육정책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할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1985년 추석 때 시골집에 들렀는데 여기서 엽서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성명이 적혀있고 한말에 의병 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자손이 있으면 기재된 연락처로 소식을 전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엽서를 보낸 분은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김명호 선생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조카이며 나의 당숙이 되는 김인술 씨는 그를 찾아 판결문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김명호 선생은 판결문을 주면서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이 지금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좀 더 자료 정리를 한 후에 독립운동의 서훈을 받으시오.”라는 말씀을 주었습니다. 나는 당숙 김인술과 함께 이 일에 뛰어들었고 1986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거병하신지 100년, 돌아가신지 65년, 해방 후 45년이 된 때입니다.
할아버지가 총칼을 들고 나선 1909년을 생각해봅니다. 조국이 일본에 의해 지배되는 처참한 상황들이 발생했지요. 1905년의 을사조약, 1907년의 군대해산 등으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처럼 위험에 처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 양태로 사람들은 갈라졌습니다. 일본에 적극 협조해서 무엇인가 얻으려는 사람과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시대에 순응하여 가족이라도 챙기려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이런 속에서도 항일의병들은 가족을 돌보려면 적당한 타협보다는 오히려 나라가 굳건히 서야 한다는 믿음으로 총을 들고 나섰습니다. 이들이라고 왜 가족의 안위가 걱정이 안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당대의 <독립신문> 등은 항일무장 투쟁에 비판적이며 이들의 행동을 폄하하기에 바빴습니다.



▲김낙선 의병 재판 판결문 중 일부- 명치 42년(1909) 11월 19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재판 판결이 있었다고 나온다.

김낙선의 의병활동과 체포까지

일본군은 호남 의병의 항쟁이 격화되고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한국병탄의 큰 장애물인 호남 의병을 속히 종식시킬 목적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까지 약 2개월에 걸쳐 호남 의병에 대한 대학살 작전을 수행합니다. 이 군사 작전을 위해 일제는 한국임시파견대의 전 병력을 호남지역의 의병 진압에 투입하여 호남 의병을 박멸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호남 의병을 탄압하기 위하여 3기로 나누어 시행하던 작전에서 부안은 제1기에 해당합니다.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 부른 호남 의병 대학살 작전으로 의병들은 큰 타격을 입고 급격히 쇠퇴합니다.
할아버지의 활동은 28세 때인 1909년에 집중됩니다. 3월에는 이용서(李用西)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총 15정, 칼 1자루를 가지고 30여명과 함께 부안·고부·태인 등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태인군 남촌면 일대에서 일본군 기병대의 습격을 받아 할아버지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겨우 탈출하여 집으로 몰래 숨어들었습니다. 집에서 부상을 치료한다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고 치료에 진척도 없었지만 4개월 만에 다시 이용서 의병장의 선봉장(先鋒將)으로 총 8자루 칼 1자루를 가지고 부하 12명을 지휘하여 고부⋅태인⋅정읍⋅부안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였고 급기야 11월 1일에는 김제군 흥산면 내리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습니다.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한 후에 총상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출옥하여 집에서 은둔했습니다. 항상 일본 순사의 감시가 따랐고 이런 속에서 동네 사람들과도 교분을 갖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 경찰은 의병장들을 거의 모두 사형시켰지만 나머지 항일의병들이 언제 다시 뜻을 펼칠까 감시의 눈으로 이들의 행동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고통과 일본 경찰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의분을 가지고 살다가 1925년에 세상을 떠나니 45세였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에 대한 이렇다 할 기록은 없습니다. 슬프게도 일본군에 체포되어 재판받은 판결문에, 그것도 일본인이 주도한 재판에만 기록을 남겼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주위 분들의 증언은 거의 없습니다. 항일 의병으로 징역까지 살다 나온 사람이기에 일본의 감시가 심하여 피해를 볼까봐 누구하나 접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랫동네 종일 씨 아버지의 증언이 거의 유일합니다.

“키가 크고 잘생겼다. 언제 왔다 가는지 모른다.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한두 번뿐이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옛 집에서 사십니다. 할아버지가 사셨던 집이고 나에게는 어렸을 때 추억이 묻어있는 집입니다. 북박골이 있는 뒷산이 해질녘이면 큰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외부로 나다니실 때 일본군들이 주둔하는 신작로를 피해서 저 산을 통해 동지들을 만나러 다니셨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뒷산을 다시 한 번 쳐다봅니다.  


▲김낙선 의병이 살았던 동네(윗감교)

후손으로서 한마디

언젠가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나러 광복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후손들을 만났는데 한결같이 가난에 찌든 초라한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넥타이라도 메고 온 사람은 나 한 사람 정도였습니다. 정말 눈앞이 캄캄했지요. 독립운동을 한 선조를 둔 덕택에 후손들까지 못 배우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작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는데도 후손들은 선조의 독립운동 사실조차 모르거나 알더라도 어떻게 할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독립유공자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합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명을 본인이 하거나 가족이 신고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항일운동을 하다가 객지에서 죽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가족이 시체를 수습할 수도 없고 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도 없는데 증명하라니요. 또한 가족이 고향이라도 떠났다면 주소가 바뀌면서 가족 찾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낙선 의병 추모공원에서 필자(김낙선 의병의 손자)

일제 때 독립운동은 일상이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 나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특별하기보다는 건강한 상식에 속하지요. 해방 후에 이러한 상식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상식을 무너뜨린 친일파가 큰 소리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증거이며 역사의 왜곡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100여 년을 의병들의 공적을 찾고 어려워진 후손들을 살피는 일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습니다. 묻힌 역사를 찾아내고 교육하는 것은 조국의 자존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부안에서 항일의병과 독립운동에 참여해서 죽거나 감옥살이 한 분들이 많은데 어떤 분은 유공자가 되었지만 그러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가족이 알 수 없는 일이 많았고 자신이 독립운동한 사실을 소상히 남긴 분들이 많지 않으니 이런 부분을 발굴하여 독립유공자를 찾는 것은 국가의 몫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기억으로 지침을 주는 귀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두려워하고 과거를 지우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과거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거를 소홀히 하는 국가에는 미래도 없습니다. 목숨을 던져서 조국을 위해 싸웠던 용사들이 어디엔가 묻혀있다면 발굴을 해야 할 것이고, 저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가르치고 조명하려고 할 때 우리의 미래는 밝을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싸웠던 30인, 그 뒤 할아버지가 이끌었던 12인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이름도 없이 싸우고 묻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가 살아 있다면 이런 분들을 밝혀야 할 것이고 위령비 하나 정도는 부안에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마지막으로 자료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 자료는 부안 지역 의병들의 판결문을 가지고 국가기록원의 김병남 박사가 정리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아직도 유공자가 되지 못한 분이 여럿입니다. 혹시 독자들 중에는 항일의병의 후손이지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후손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행적을 밝히고 관심을 갖는 것은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출발이 될 것입니다.


▲김낙선 의사 기적비, 감교마을 앞 큰길가에 있음

/ 김성화(부안교육지원청 과장)


이 기사는 '부안이야기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코멘트 쓰기
코멘트 쓰기


비밀번호 확인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