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03-30 (19:41)
정겨움과 투박함을 심어주던 왕포마을의 추억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4502

▲모항 아홉구미에서 본 줄포만의 아침. 바다로 깊게 파고든 지점이 왕포마을이다.


'살결이 하얀 아이의 편지를 땅에 묻다'
정겨움과 투박함을 심어주던 왕포마을의 추억

 

 

 

버스를 공짜로 타다

어린 두 발로 급경사 길을 20여 분 걸어 올라서면 파란 바다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해안가에 25가호 정도의 작은 집들 그리고 하얀 모래사장이 있는 곳, 지금도 내 마음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있는 고향 ‘왕포 마을’입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우리 마을을 가는 길은 쉽지 않았어요. 오가는 버스는 아침, 점심, 저녁 3대 뿐이었습니다. 변산반도의 해안 마을을 연결한 도로는 지금처럼 곧은 것이 아니라 실타래처럼 구불거리고 엉켜 있었고요.
버스가 많이 없으니 버스 타는 것은 그야말로 전쟁터와 같았고 항상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사람들로 버스의 조수(안내양)는 출입문을 닫을 수 없어 항상 문을 열고 두 손으로 잡고 곰소까지 다녔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당시 왕포 마을에서 운호국민학교까지는 걸어서 30분 이상 걸렸는데 우리는 걸어서 다녔고, 아이들은 마동, 중마동, 작당, 왕포, 관선, 운호, 소운호 마을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곰소에 있는 변산 중학교까지는 걸어서 2시간 이상이 소요되었기에 버스나 자전거를 이용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버스를 공짜로 태워달라고 줄을 서 있다가 기사 아저씨가 태워주면 너무도 좋아서 재잘거리며 공짜의 기쁨을 만끽했지만, 버스에 태워달라고 기다리다가 태워주지 않으면 지름길로 가서 버스가 올라가기 힘든 언덕길에 숨어 있다가 돌을 집어 던져 버스 뒤의 미등이나 브레이크 등을 깨고 도망가기 일쑤였습니다. 우리 동네 형 하나는 돌을 잘못 던져 버스 뒤의 큰 유리창을 깨서 버스기사 아저씨가 차를 세우고 마을까지 쫓아와서 유리창 값을 받아 갔던 적도 있어요.
버스를 태워주지 않는 날이면 우리는 마을 전체 애들이 모여서 줄을 맞추고 발도 맞추면서 행진하듯 초등학교에 갔어요.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보고 있다가 그렇게 등교하지 않는 동네 아이들은 기합도 주고 혼냈기 때문에 우리들은 초등학교가 보이기 전까지는 대충 가다가도 학교가 보이는 고개를 넘는 순간 지금의 북한군처럼 줄도 제대로 맞추고 발맞추는 구령도 힘차게 붙이며 등교했던 그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와요. 그런 과정에서도 선생님이 정해준 우리 동네 대장 형은 제대로 줄을 맞추어 가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하여 말을 듣지 않던 형들과 싸우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왕포마을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데

내가 다닌 학교는 운호국민학교인데 학생들이 너무 적어서 폐교되고 지금은 그 자리에 미술관과 펜션이 들어서 있습니다. 국민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 우리는 한글도 몰랐고 구구단은 완전히 딴 세상 이야기였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에는 한글과 구구단을 익히기 위하여 매일 받아쓰기와 구구단을 시험 본 기억 밖에 없습니다. 정규수업 시간에 시험 통과를 못한 애들은 오후에 남아서 합격해야만 선생님이 보내주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선생님들이 출퇴근 하지 않고 전부 관사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교실에서 공부하다가 외우는데 자신이 생기면 선생님이 생활하는 관사로 가서 구구단을 외우고 합격을 하면 ‘아이고, 좋아라~’고 소리 지르며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 동네는 다른 동네보다 초등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동네까지 가려면 공동묘지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무서워서 합격을 해도 동네 애들이 다 합격할 때까지 학교에서 기다립니다. 함께 뭉쳐 가면 무서움이 덜할까 해서요. 우리 친구 중 정말로 구구단을 못 외우는 친구가 하나 있어서 우리는 그 친구를 기다리다 맨날 해지름 때가 되어야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해가 떨어져서 어두워지면 우리는 공동묘지 지나가는 것이 너무 무서워 숨을 모두고 모두 같이 천천히 가자고 약속하지만, 공동묘지에 들어서면 일단은 말이 없어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죽어라 뛰기 시작하여 고무신이 벗겨져도 줍지 못하고 그대로 집에 갔다가 다음날 아침에사 찾아서 학교에 가곤 했습니다. 구구단을 못 외워서 남았던 친구는 미안해서 우리에게 사탕을 사주었고 우리는 사탕 먹는 재미로 같이 다녔으며, 지금도 그 친구를 만나면 구구단 한번 외워보라고 농담하면서 옛날의 추억을 되새겨 봅니다.


▲왕포사람들


살결이 하얀 아이의 편지를 땅에 묻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우리 학년이 13명이었는데 우리 동네에서만 여섯 명이 같은 반이었습니다. 전교생은 70여 명 남짓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급 학년(4, 5, 6학년)이 되어 구기 종목을 할 정도가 되면 우리는 하루의 반절 정도는 체육 활동으로 수업을 대신했습니다. 시간표에는 국어 시간이어도 그 시간에 4, 5 ,6학년 중에 체육을 하는 학년이 있으면 전부 체육활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축구, 배구 등은 한 학년으로는 학생 수가 너무 적어서 할 수 없었으므로 4, 5, 6학년 전체가 나서야만 체육 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4학년 때는 도시에서 쌍둥이 자매(신지혜, 신지명)가 아버지의 면사무소 근무지로 인하여 전학을 왔습니다. 둘 다 우리 촌애들 하고는 다르게 살결도 너무나 희었으며, 옷들도 예쁘게 입고 다녔습니다. 선생님은 저와 지혜를 짝꿍으로 정해 주었고, 친구들은 나를 약 올리기 위해 내가 그 애를 좋아한다고 놀리곤 했습니다. 나는 도시 여자애와 같이 앉는 것이 부담스럽고 부끄러워 책상에 선을 그어 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하고 지혜가 주었던 지우개도 싫다고 던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내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던 더 큰일은 지혜가 쪽지 편지를 나에게 준 때였습니다. 나는 다른 애들이 그것을 알면 어쩌나 하여 그 편지를 들고 학교 뒷산 깊은 곳에 가서 읽어 보니 내용은 너희 마을이 바닷가니 너희 집에 놀러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땅에 묻고, 학교로 와서 절대로 오지 말라고 말하고 온다는 일요일에는 우리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에서 하루 종일 놀고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의 좋은 감정을 표현 못한 순수한 기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를 때면 지혜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몹시도 궁금하지요. 우리를 설레게 했던 도시의 쌍둥이 자매는 6학년이 되기 전에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다시 도시로 갔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갯벌을 걸어 다니면서 모기장 같은 기구를 이용하여 새우를 잡는다.

하늘에서 불씨가 쏟아지고

왕포 마을은 바닷가 어촌이었기 때문에 넓은 갯벌 생활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학교를 마치면 우리는 갯벌로 나가서 막대기를 꽂아 놓고 축구를 했습니다. 갯벌이 미끌미끌하기 때문에 우리는 억지로 슬라이딩을 하고 친구를 잡고 뒹굴고 하여 얼굴부터 발끝까지 온통 개흙으로 범벅이 되어 눈을 뜰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갯벌을 달려서 물이 있는 곳까지 뛰어가 바닷물에 다이빙하며 몸에 묻은 뻘을 씻어내곤 다시 친구들과 물장난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놀다가 배가 고프면 갯벌에 있는 꼬막도 잡고 바위에 붙어있는 소라 등을 따서 깡통에 삶아 먹고 어떤 때는 고기를 잡기 위해 어른들이 쳐 놓은 그물에 있는 고기를 몰래 서리하려다 아저씨에게 들켜서 갯벌에서 포복하고 머리 박으라 하고 노래하면 용서해 준다고 하여 울면서 노래했던 그 때의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우리는 놀기도 했지만 집집마다 일이 많아 집안일을 돕는 것은 필수였습니다. 그중에 우리들이 가장 많이 했던 것은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갯벌을 걸어 다니면서 모기장 같은 기구를 이용하여 새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없을 때에도 갯벌을 걷는 것은 힘이 드는데 물이 들어 왔을 때 새우 잡는 기구를 끌고 다니면서 걷는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네 아이들은 다리 근육이 발달하여 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는 항상 1등이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많이 했던 것은 모래사장에서 축구, 야구 그리고 자치기 등이었고 보름 때가 되면 빈 깡통을 이용하여 쥐불놀이를 하는데 다른 동네에까지 가서 쥐불놀이 하다가 동네끼리 패싸움 하다가 코피도 많이 터졌습니다. 보름날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쥐불놀이 깡통을 날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깡통에 나무와 솔방울 등을 넣고 계속 돌려가면서 불씨를 깡통 가득 채웁니다. 불씨가 거의 다 차면 우리 모두는 높은 절벽이 있는 바닷가 언덕에 올라가서 모두 깡통을 돌리다가 하나, 둘, 셋에 깡통의 줄을 놓아 바닷가 공중에 던지면 깡통에서 떨어지는 새빨간 불씨들이 온통 하늘을 수놓는 광경은 지금의 불꽃놀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우리들만이 경험하고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운 비밀 풍경 중 하나였습니다.


▲옛 운호초등학교

라면을 처음 먹어보고

동네에는 다른 마을에 없는 또 하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안가를 지키는 군인아저씨들이었습니다. 1개 중대 규모의 군인 아저씨들은 해안가에 초소를 지어 놓고 해안가를 쭉 따라가면서 참호를 파고 저녁이면 간첩이 넘어오지 못하게 근무를 서는 것이었습니다.    
군인아저씨들이 있는 숙소는 군견(軍犬)까지 있어서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고 항상 총을 가지고 다녔기에 우리는 초소에 갈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서는 초소에 가서 출항 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바쁘면 우리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혼자 가기가 무서우니까 친구와 같이 초소에 가지만 짓궂은 군인아저씨들은 춤추고 노래하면 신고서를 끊어준다고 약 올리고 우리가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건빵을 준다고 꼬드겨서 우리를 가지고 항상 장난질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아저씨들과 친해지게 되어서 나중에는 초소까지 놀러가서 건빵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라면도 얻어먹었습니다. 겨울에는 철새 사냥을 한다고 실탄 총을 들고 우리에게 사격 솜씨를 보여 준다고 언덕에 엎드리라고 하고 철새가 앉아 있는 저수지에 총을 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다 날아가 버리면, 우리가 떠들어서 새들이 놀라 날아가 버렸다고 우리에게 투덜거리던 그 아저씨들은 지금도 그때 일을 기억이라도 하는지 몹시 그립습니다.


▲운호초등학교 자리에 들어선 휘목미술관

고등학교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동네 형들은 중학교를 마치면 당연한 듯 고깃배를 타며 어부가 되어 생활을 했습니다.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라도 가는 비율은 3분의 1정도였고 우리 집도 5남 2녀 중 남자 둘 정도가 중학교 문턱이라도 가봤습니다. 아버지들은 바다가 태풍 등으로 항상 위험했기에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부자(夫子)가 같은 배를 타기보다는 자기 자식은 다른 집 배에 태웠습니다. 풍랑으로 사고가 나도 둘 중의 하나는 살 수 있다는 슬픈 경험에서 나온 지혜지요. 그래서 나 또한 누구네 집의 배를 타면서 살까 살폈기에 학교는 중학교까지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있는지는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머슴을 두고 살 정도로 부유했다고 합니다. 꽁지배라는 안강망 어선이 2척, 밭뙤기도 조금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형 결혼식 날 버스가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이것을 해결하느라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져 빚더미에 오르자 형들은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하여 나가야만 했다고 합니다.
도시에 나간 형들은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이 일을 많이 하고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봐왔기에 동생들만이라도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큰형은 담임 선생님을 찾아와 면담하고 나를 고등학교에 진학시키려 하니 공부 좀 시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형은 군산에 살았는데 ‘7개년 간 고입총정리’ 문제집을 사다 주셔서 그것으로 공부하여 익산 인문계로 진학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진학할 당시에는 국가에서 사범대학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보조해 주었습니다. 집안이 어려운 나는 전북대학교 수학교육과로 진학하였고 지금은 교직에서 우리의 꿈나무들을 힘을 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24년 동안 교직을 걸어오면서 학생들과 웃고 울며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힘은 내 마음에 항상 정겨움과 투박함을 심어주었던 어린 시절 변산반도의 한적한 어촌 ‘왕포 마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순수한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이곳 도시 생활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헤엄치고 구구단을 외웠던 그 시절의 친구들과 나를 지금까지 있게 해준 우리 가족과 선생님들,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남은 인생을 각박한 세상 속에서 빛이 될 수 있는 후학을 기르는 일에 더욱 열정을 다하고자 합니다. 이번 주에는 왕포 뒷산에 있는 아버님의 산소에 올라가 햇빛에 눈이 부시는 먼 바다를 보면서 그 옛날의 나를 만나보렵니다. 이렇게 고향 생각만 해도 내 몸은 이미 왕포 갯벌에 와 있습니다.

/ 주창수(전북사대 부설고등학교 교사)

이 기사는 '부안이야기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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