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03-19 (15:09)
일제의 어업 수탈 전진기지 곰소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4333

곰소항만ⓒ부안21


줄포만, 조기떼 울음소리의 전설만
일제의 어업 수탈 전진기지 곰소

 

 

들어가며

2003년 3월 1일 서울에서 남북 공동으로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가 열렸다. 이때 ‘일본의 2차 범죄행위에 책임을 묻는다’는 주제로 남북공동학술토론회가 열렸는데 당시 한성대 총장 윤경로 씨(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일제의 미곡 수탈액은 1,849억 3,292만 엔이었으며 수산물은 1조 114억 5,076만 3,000엔이었다. 지하자원 수탈액은 무려 4조 2,739억 3,758만 2,000엔이었다. 1938년 이후 통계만 해도 일제의 금 수탈량은 121톤을 상회했다. 2013년 현재 한국은행이 보유한 금은 104톤이다. 일제는 조선의 금으로 전쟁 놀음을 벌인 것이다.
수산물의 수탈액은 미곡 수탈액의 5배가 넘었고 지하자원 수탈액은 23배 이상이었지만 1965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 때 대일 배상 요구에서는 한 푼도 청구하지 않았다.
줄포만은 서해에서 가장 큰 어장을 지닌 칠산 바다 한 자락이 내륙으로 파고들어 이루어진 만이다. 줄포만을 통한 일제의 수산물 침탈에 대해 알아본다.

강화도 조약, 어업 침탈이 시작되다

동아시아에 대한 세력 확장을 위해 창설된 미국 동인도 함대의 사령관 매슈 페리(Matthew C. Perry)가 1853년 7월 8일 주함인 서스케한나(Susquehanna, 2,450톤)호 및 4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에도만(江戶灣, 현 도쿄만)에 나타났다. 당시 천석선(千石船, 150톤)이 가장 큰 배였던 일본에서 검은 선체에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등장한 페리 함대의 위용에 일본은 경악했다. 이때 일본인이 받은 공포와 혼란을 일본에서는 ‘흑선충격(黑船衝擊)’이라 한다. 페리는 에도막부에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이것이 ‘1차 페리 내항’이다.
1년이 채 안된 1854년 2월 13일 페리는 9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다시 나타났다. 일본은 요코하마 항을 급조하였으며 이곳으로 상륙한 페리는 에도막부와 ‘미일화친조약(神奈川條約)’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영사재판권을 넘겨주었으며, 협정관세제를 수용하여 관세 자주권을 상실했고 일방적 최혜국 대우를 받아들였다. 이 해에 일본은 같은 내용의 통상조약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와 체결했는데 이 모두를 합쳐 ‘안세이 5개국 조약(安政五個國條約)’이라 부른다.



이후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전환점으로 전근대적인 왕정복고를 단행하여 절대주의 천황제를 성립시키고, 경제적으로는 초근대적인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본주의를 구축해나갔다. 일본은 당시 제국주의 국제 환경 속에서 서양인들이 벌이던 전쟁을 아시아를 상대로 모방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조선이었다.
1875년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에 나타나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영국에서 들여온 군함 운요호는 배수량 245톤, 전장 35.7미터, 전폭 7.2미터, 흘수 2.3미터, 106 마력의 2기통 왕복동기관을 장착한 목조 쌍돛대 범선에 불과했다.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은 미국이 일본에 강요한 똑같은 방식의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강요했다. 이것이 이듬해 2월 27일에 맺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이다. 모두 12관으로 되어 있는데 제7관에서 ‘일본은 조선의 해안을 측량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후 일본은 조선 연안 어장을 샅샅이 뒤져 수산자원 약탈의 기초 조사를 충분히 해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선대에서 본 줄포만ⓒ부안21

한말의 수산업

동진강, 만경강, 금강이 한 해역에서 만나는 중심에 고군산군도가 있다. 전북의 고군산군도와 위도, 줄포만을 중심으로 충남과 전남 일부는 서해 수산업의 요람이었다. 삼남 지방에서 어세가 가장 많았던 곳이 전라도였다.
이곳은 해안선의 굴곡이 심해 매우 길며 동진강, 만경강, 금강이 날라다 부리는 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어 조기를 비롯한 다양한 어족자원이 산란을 위해 회유해 들어왔다. 주요 어장으로는 고군산군도·죽도·연도 근해어장, 칠산도⋅위도 근해어장, 어청도 근해어장, 천수만 근해어장 등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칠산도, 위도 근해 어장은 손꼽히는 어장으로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 3대 조기어장이었다.
이 같은 어장을 탐낸 청나라와 일본은 일찍부터 밀어와 통어를 자행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어장을 침식하기 위한 첫 단계로 군산과 어청도에 이주 어촌을 건설한 바 있으며 1910년 병탄 이후에는 위도 등 곳곳에 일본인들이 들어왔다. 위도 치도리에는 일본 어부들을 상대로 하는 유곽이 들어서기까지 했다고 한다.
매년 4월이면 한·일 어선이 출어하였다. 4월 초순부터 7월까지 조기, 삼치, 도미, 병어, 농어, 아귀 등을 포획했고 성어기가 끝나면 일본인은 다른 어장으로 이동한 반면 한국인은 주목망을 이용해 8월까지 갈치나 병어를 잡았다.


동아일보 1936년 1월 31일자 기사“황해안에 면하야잇는 부안지방은 각종 해산물이 풍부한 중 특히 굴비는 전 조선에 굴지(屈指)하는 특산품으로 황해도 연평산이 잇으나 질에 잇어서 비(比)가 못된다고 한다. 이에 숫자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부안굴비의 원산지는 칠산해로 줄포지방에서 제조한다는데 연산수량(年産數量)이 십삼만삼천백오십킬로구람이며 연산액(年産額) 이만사천삼십원(圓) 집산액(集産額) 이십만원(圓)이라는 다대한 숫자가 된다는데 이 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줄포의 삼십육호 팔백이십팔명 중 여자도 사십오명이나 된다하며 판매로(販賣路)는 전 조선의 방방곡곡 어느 지방이고 가지 않는 데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안산 굴비가 명성이 높은 것은 산액(産額)도 상당할 뿐 아니라 품질이 연평산에 비하야 살이 두터워서 맛이 잇고 거죽이 열버서 양이 만타고 한다.”

줄포만의 조기잡이

줄포만을 중심으로 조기잡이와 굴비 가공업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4월 중순에서 5월 상순까지 이곳의 수온은 11~14도로 조기산란의 최적온도여서 산란을 위해 3, 4월에 흑산도를 거쳐 조기떼가 이곳으로 회유해 들어왔다. 칠산 바다의 넓은 갯벌은 이들에게 풍부한 먹이를 대어주었다.


▲조기 가공ⓒ부안21

이들 밀려드는 조기떼를 대량으로 포획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우선 어살, 주목망 등 정치성 어구를 설치하는 데에 다량의 대나무가 필요했다. 변산 인근의 대나무와 싸리나무는 어살 등의 어구를 제작하는 데 충분한 원료를 대어주었다. 또한 옛날에는 냉동시설이 없었으므로 잡은 고기를 바로 절여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하였으며 소금을 구우려면 소나무 장작이 필요했다. 변산의 소나무는 이에 필요한 장작을 대어주었다.
또한 줄포만에는 갯골이 발달해 있어 썰물 때에도 배가 다닐 수 있었는데 이 또한 조기잡이에 유리한 역할을 했으며, 이 갯골을 따라 포구가 발달했다. 이처럼 줄포만은 일시적으로 밀려오는 조기떼를 짧은 기간 동안에 잡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잡힌 조기는 연평도에 비해 시장조건이 불리하여 대부분 염장 가공되어 굴비라는 이름으로 줄포, 법성포 등지를 통하여 내륙으로 들어가 널리 판매되었으며 ‘영광굴비’라는 명성을 얻었다.
나일론 그물이 나오기 이전의 옛날에는 그물을 이용하여 짧은 기간 동안에 대량으로 고기떼를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곰소만에서는 일찍부터 대나무, 싸리나무 등을 엮은 어살이라는 일종의 정치망을 갯벌에 설치하여 밀물을 따라 밀려온 고기떼가 썰물을 따라 나가면서 걸리도록 하여 고기를 잡았다.
이러한 형태의 어업을 어전(漁箭) 어업이라 한다. 해변에서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는 독살(石箭)이 있었다. 이는 밀물이 들어왔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곳에 돌을 두세 자 높이로 쌓아두고 고기를 잡는 가장 원시적인 고기잡이 방법이다.

바다와 육지의 접점 줄포

칠산바다 한 자락이 변산과 선운산 사이를 뚫고 내륙으로 쑥 들어온 끝에 줄포가 있다. 줄포는 칠산어장과 호남평야의 접점인 것이다. 일제는 일찍이 이곳에 눈길을 돌려 수탈의 중심지로 삼았다. 구한말부터 이곳에 헌병대를 주둔시켜 의병의 습격으로부터 일인들을 보호하고, 미곡 무역을 통해 호남평야의 쌀을 빼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객주들은 차츰 사라지고 1910년 합병 후부터는 일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바다를 매립하고 택지를 조성해 경찰서, 식산은행 줄포출장소, 우편국, 곡물검사소, 남선(南鮮)전기주식회사 줄포출장소, 소방서 등의 기관을 들여앉혔으며 항만을 축조했다. 이는 모두 일본의 공산품을 들여오고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내가기 위한 조처였다.
성어기가 되면 어족이 다양하기로 유명한 칠산 어장의 생선들이 수백 척의 배에 실려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위도에서 잡은 조기는 이곳에서 염장 가공되어 굴비로 만들어져 내륙으로 들어갔다. 조기잡이 철이 되면 줄포항엔 수백 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고, 집집마다 조기를 절여 말리느라 지붕까지 허옇게 뒤덮이곤 하였다. 또한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에서 잡히는 선도 높은 생선으로 담근 각종 젓갈은 줄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전성을 구가하던 줄포항은 토사가 밀려들며 선박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차츰 그 위치를 곰소항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위도로 가던 연락선도 곰소에서 출발하게 되고 1958년도에 어업조합과 부두노조가 곰소항으로 이전하면서 활기를 잃고 말았다. 1980년 이후로는 간간히 오가던 소형 선박마저 닿지 않는 완전한 폐항이 되고 말았다.


▲곰소 건어물시장ⓒ부안21


▲곰소 젓갈시장ⓒ부안21


▲곰소염전ⓒ부안21


어업 수탈의 전진기지 곰소

곰소에는 원래 범섬, 곰섬, 까치섬 등의 무인도가 있었다. 곰섬 앞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명주실꾸리 하나가 다 풀어져 들어갈 만큼 깊었다 한다. ‘곰소 둠벙 속 같다’는 이 지방 속담도 있다. 그래서 곰섬을 ‘웅연도’라 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검모포는 부안현 웅연 남쪽에 있다(黔毛浦 在扶安懸南熊淵)”라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곰소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웅연조대(熊淵釣臺)’는 변산 팔경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줄포항을 통하여 물자를 수탈해가던 일제는 줄포항이 차츰 뻘로 메워져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렵게 되자 1938년에 위의 세 섬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아 육지로 연결한 다음 항만을 축조했다. 제방 안쪽으로 염전을 만들고 제빙공장도 세웠다. 염장가공과 선어를 보관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200여 톤 급의 배가 드나들게 되고 1958년에는 어업조합과 부두노조가 줄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줄포항은 폐항이 되다시피 했지만 곰소항은 군산에 이어 전라북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로 떠올라 전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곰소항도 토사가 쌓여 1980년대 이후 그 역할을 격포항에 내주게 되었다.


▲갯벌에 묻힌 줄포항ⓒ부안21


▲곰소-위도를 왕래하던 서해훼리호(1988년), 그러나 곰소항도 토사가 쌓여 1990년대 초에 그 역할을 격포항에 내주었다.ⓒ부안21


나가며

현재 곰소항은 소형 선외기 정도만 포구에 접안을 할 수 있다. 칠산 바다 수산물의 집산지 곰소항은 건어물과 젓갈가공공장으로 간신히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조기떼 울음소리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던 이야기만 전설처럼 남아있다.
줄포만에서의 수산업 궤멸은 토사 퇴적이 주원인이다. 어족 자원의 산란장이 되는 모래펄 갯벌이 진펄이 쌓여가며 죽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곰소항 선착장에 나가보면 토사가 쌓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줄포만의 토사 퇴적은 일제의 무분별한 공유수면 매립에서 비롯되었다. 이로 인해 유속이 떨어져 토사가 쌓이는 악순환이 지속돼온 것이다.
줄포만의 매립은 최근까지도 벌어졌다. 이로 인해 줄포항이 육지 속으로 갇혀버렸다. 줄포만의 매립으로 줄포만의 수산업이 멸절했듯이 새만금사업으로 위도 어장과 고군산군도 어장이 멸절 위기에 놓여있다. 그 원인은 방조제 밖으로 쌓이는 토사 때문이다. 일제가 뿌려 싹튼 씨앗을 없애지 못하고 해방 후 오히려 더 키워놓은 결과이다.

/ 허정균(뉴스서천 대표)

이 기사는 '부안이야기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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