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09-19 (11:44)
과거제도 급제자로 읽는 부안의 인물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3088

▲김석필 홍패(부안김씨종중고문서)

 

과거제도 급제자로 읽는 부안의 인물
[부안이야기]문·무과 합격자에게는 홍패를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는 백패를...

 

 

지금이야 직업도 다양해서 어느 면에서라도 일가를 이루면 존경도 받고 경제적인 부도 누릴 수 있지만 전통사회는 달랐다. 조선시대 같은 경우는 사농공상의 차별 속에서 직업군도 다양하지 못했으며 과거제도(科擧制度)가 거의 유일한 출세의 통로가 되었다. 김홍도의 풍속화 가운데 부모가 방 안에서 물레질과 돗자리를 짜는 일을 하고 있는데 방 한구석에서는 방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책을 보는 아들이 있다. 과거제도에 매달리는 당시 분위기를 반영하는 그림으로, 비록 가난해도 과거에 합격만 하면 본인의 출세는 물론 집안도 살릴 수 있다는 분위기 속에서 과거에 매달린 당시의 사회상이다. 궁벽한 시골인 부안도 이런 과거제도의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글에서는 전통기 우리나라 과거제도의 운영에 대해 살펴보고 부안의 과거 합격자도 한번 들여다볼 예정이다.


부안군지의 인물 기록


▲김수종 백패(부안김씨종중고문서)

‘인물(人物)’이라 함은 대체로 보통사람보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아무나 쉽게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해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작게는 집안이나 종중(宗中)을 이끄는 인물도 있을 수 있고 고을이나 나라, 또는 세계를 이끌어가는 큰 인물도 있지만 그 인성이 넉넉하지 못하거나 행의(行誼)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인물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공자(孔子)와 도척(盜跖)은 같은 시대를 산 사람으로 긴 세월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한분은 밝고 따뜻한 해님이요, 다른 한 사람은 캄캄한 밤거리의 흉악범으로 평가된다.
긴 세월 동안 우리 고을에서는 인물로 평가받는 분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그분들의 공덕(公德)은 고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에 대하여 1991년에 간행된 『부안군지(扶安郡誌)』 인물편(人物篇)을 보면 많은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대부분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부안고을 사람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거나 관직에 나아간 사람, 학덕(學德)이 높았던 명현(名賢), 그리고 국가에 충성을 바친 충신, 부모와 남편에 대한 효열(孝烈)이 장했던 분 등 다섯 가지를 그 범주로 하고 있다. 당시를 기준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이후의 행의와 덕망이 높았던 몇몇 분들을 기준도 없이 선정하여 ‘현대 인물’로 기록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인물됨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친 애국지사였어도 이념적으로 좌경적이라 하여 인물난은 고사하고 어디에서도 이름 석 자 찾아볼 수 없음은 올바른 역사서(군지)라 하기 어렵다.        
  

합격하면 홍패와 백패를

나라에서 인재, 즉 인물을 뽑아 쓰는 일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요한 일로 여겨온 것 같다. 멀리 신라시대인 788년에 처음으로 독서삼과(讀書三科)라 하여 독서량 등을 시험하여 상·중·하의 등급으로 인재 등용을 하였다고 하였으나 엄격한 인재 등용의 과거제도가 실시되기는 그로부터 2세기쯤 후인 958년(고려 광종 9년) 중국 한(漢) 나라의 과거제도를 모방하여 실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제도가 조금씩 개선되기도 하고 문란해지기도 하면서 1894년 갑오경장 이전까지 지속되었으니 약 936년 동안 이 제도로써 국가를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인물들을 가려 썼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과거제도가 정착되면서 왕족이나 그 척신,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고위직을 세습 독점하지는 못하게 되었고 부패의 온상인 낙하산 타고 내려오는 인사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민초들 중에서도 학식과 기량 등이 출중한 사람은 국정에 서용되게 되면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이 된 것은 사실이다. 조선조에 들어 이 제도가 더욱 발전하여 ‘과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과(大科: 文科와 武科)와 그 전단계로 자격고사 성격의 소과(小科: 生員, 進士)를 거쳐야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열리게 되니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유일한 출세의 길이요 청운의 꿈이었다. 여기에 합격, 또는 급제하면 이른바 양반계층으로까지 신분상승이 될 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가 함께하였다.  
특히 대과인 문과에 급제하면 왕이 내리는 홍패(紅牌: 붉은 종이에 쓴 합격증서)를 받고 머리에 어사화(御史花)가 꽂아지며 왕이 내리는 어주삼배(御酒三盃)를 마시고 서울 거리를 삼일유가(三日遊街) 하였으며 금의환향(錦衣還鄕), 호호거리며 고향에 들어서면 마을 앞에는 붉은 칠을 한 긴 장대 위에 푸른 용을 앉힌 화주(華柱, 소줏대)를 세우고 고을사람들이 모여 축하의 도문연(到門宴) 잔치를 베풀었으니 우화등천(羽化登天)이 바로 이것 아니었겠는가. 이와 같은 과거 민속은 소과에 합격하여도 같은 형태로 행해졌으니 이로 미루어보아 문과의 대소과(大小科)에 급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문·무과 합격자에게는 홍패를, 생원진사시나 잡과 합격자에게는 백패를 주었는데 곧 합격의 증명서라 할 수 있다.


▲『부안지』(1887년간, 허상균 소장)에 보이는 부안의 인물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변질

나라에서는 전국에서 인재를 고르게 뽑아 쓰기 위하여 팔도의 크기와 인구의 과다에 따라 응시자의 정수를 균배하였으니 예를 들면 서울과 경기지방은 200명, 충청과 전라도에는 각각 60명, 경상도는 100명의 정수가 문과를 뽑는 최종 복시(覆試)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으며 3년마다 간지(干支)의 자(子)·묘(卯)·오(午)·유(酉)자가 든 해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하므로 이를 식년시(式年試)라 하였다. 문과의 경우 최종 급제자 정수는 33명이며 장원 급제자를 필두로 성적순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면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이를 빌미로 임시로 과거를 시행하였는데 이를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알성시(謁聖試)·춘당대시(春塘臺試)라 하였다. 예컨대 제주도에서 임금에게 진상한 향기 좋은 감귤이 도착하면 이를 종친과 고관 등에게 나누어주며 치르는 황감과(黃柑科)라는 임시시험도 있었으니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무과(武科)는 고려 공민왕 말년에 잠시 있었다가 곧 폐지된 것을 조선조 초에 복원한 것으로 궁술(弓術)·검술(劍術)·총술(銃術)·승마술(乘馬術)·병서(兵書)의 강독 등을 초시 복시의 절차를 밟아 문과와 비슷한 방식으로 시행하였다. 별로 어렵지도 않았고 선발인원도 수백 명, 어느 때는 1만여 명 이상을 한 번에 뽑기도 하여 별로 인기도 없었다. 과거제도도 조선조 말기인 헌종 때 이후로는 3년 식년시의 제도도 차츰 무너져 격년, 또는 매년 실시하기도 하고 점차로 권문세가의 독점물이 되어가면서 극도로 문란해져 과거팔폐(科擧八弊)의 부패상에 대한 여론이 높아져 그 신뢰도와 함께 권위도 크게 추락하였다. 어느 시대나 나라가 망하려면 인사제도가 공정치 못하고 그로 인해 관료사회가 부패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과거에 급제한 부안사람들

과거 합격자 명단을 방목(榜目)이라 하는데, 문과방목은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정리되어 있으나 다른 시험의 방목은 소홀하여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부안의 경우 고려조 과거가 시행된 이래 936년 동안에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63명(고려조 10명, 조선조 53명)에 이르고 무과 급제자는 150여 명에 이른다. 또한 소과(생원진사과)에 합격한 분은 113명이었고 음직(蔭職)·음사자(蔭仕者)라 하여 과거를 거치지 않은 자가 부조(父祖)의 공훈에 의하거나 고을의 수령 등에 의해 학덕이 높거나 신망이 있는 소과 합격자 등으로 천거되어 벼슬에 나간 분이 232명(고려 12명, 조선조 220명)이어서 모두 460여 명이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삼태육경(三台六卿: 3정승과 6판서의 별칭) 등의 고위직에 오른 인물은 불과 10여 명에 그치고 있다. 그것도 고려조에 집중되어 있으며 조선조에 이르면 고위직에 오른 이는 3~4명에 불과하다.
고려 신종 때 김의(金宜)는 문과 평장사(平章事: 정2품)로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는데 그는 고려의 명현(名賢) 지포(止浦) 김구(金坵)의 부친이다. 김구는 고종 때의 명신으로 문장이 뛰어났고 문과 2등으로 급제하여 평장사와 세자이사(世子貳師)였고, 그 아들 김여우(金汝盂)는 형부상서(刑部尙書)였으며 김여우의 동생 김승인(金承印)은 대사성(大司成)이었다. 호석(扈碩)은 충렬왕 때 사람으로 보안백(保安伯)에 이르고 김수용(金壽龍)은 김구의 현손으로 공민왕 때 집현전 대제학(大提學)이었다.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아들 임세경(林世敬)은 우왕 때 상호군 판민부사(上護軍 判民部事)였으며 임숙(林淑)은 임춘의 손자로 우왕 때 보안백(保安伯)이었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중앙정부에서 고위직에 오른 분은 불과 세 사람에 그치고 있다. 조선조 초 정종 때 채충경(蔡忠敬)이 예조판서(禮曹判書)였고 호주(扈周)가 보안백(保安伯)이었으며 명종조(明宗朝)에 옹정출신 김계(金啓)가 황해감사와 이조참판(吏曹參判: 종2품)을 역임하였을 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아니면 통정(通政), 통훈(通訓)이요 지방의 수령 등을 역임하는데 그쳤다.
문과 응시의 자격고시격인 소과에 입격(入格)한 사람이 113명이었는데 능력의 유무를 떠나 대과에 응시조차 하지 않은 분들도 꽤 있었다. 소과만 합격하고 대과는 보지 않는 풍조가 15세기 이후 두드러졌는데 중앙정부의 붕당 패거리 싸움이 역겹고 역모(逆謀)나 사화(士禍) 등에 연루되어 자칫 몸과 집안까지 망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자기의 능력만 보여주는 소성(小成)에 만족하고는 은거자수(隱居自修)한 분들이 있었다.
부안의 인물 중에도 그런 분들이 여럿 보인다. 예컨대 보안면의 판곡리에 살았던 죽계(竹溪) 김횡(金鋐)은 선조 6년 소과 식년시의 진사시에 장원(壯元, 1등)을 하고 생원시에서도 2등을 하였으나 대과에는 응시를 안 하고 수기(修己)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 동생인 화곡(火谷) 김명(金銘) 역시 생원과 진사 양과에 합격하였음에도 그 형과 같이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고 학문의 길을 걸어 당대 부안의 최고 문장가로 살았다.  


잡과 합격자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조선사회는 철저한 신분사회여서 중인계층과 천민들은 경향(京鄕)의 서리(胥吏)에 종사하거나 역관(譯官)·의원(醫員)·법률을 다루는 율과(律科) 등의 잡과(雜科)에 응시하였다. 잡과는 대소과(大小科)의 구분이 없는 단일과로 초시와 복시만으로 치르는 역과(譯科)·의과(醫科)·율과(律科)·음양과(陰陽科: 天文學, 地理學, 命課學) 등이 있었다. 기술직의 일종으로 양반계층은 응시를 하지 않았고 경쟁 또한 크지도 못했다. 합격자의 명단인 잡과방목은 단회방목(시험별·전공별로 발급)조차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잡과에 관한 어느 기록에 의하면 부안의 토반인 부안김씨에서도 조선조 숙종 때 3대에 걸쳐서 역과(譯科: 역과에는 중국어인 한어과와 몽고어과, 일본어과가 있었음)의 한어과(漢語課)에 합격한 기록이 보이는데 족보에는 물론이요 군지에도 전혀 그런 기록이 보이지 않음은 어찌 된 일일까?
잡과 중 의과와 율과는 요즘 말하면 의료업과 법률에 관계되는 전문직 시험이다. 직업이란 시대에 따라 선호가 달라진다. 요즘에 법률전문가나 의사가 되었다면 가문의 영광쯤으로 생각되어 기록에도 신경 쓸 텐데 당시에는 그런 직업을 가졌다는 것 자체를 기록하지 않을뿐더러 숨기려 했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김형주(부안역사문화연구소 고문, 전 부안여고 교장)

<부안이야기 12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

 

 

코멘트 쓰기
코멘트 쓰기


비밀번호 확인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