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08-28 (16:24)
[부안이야기]‘부안’이라는 이름과 부안이 품은 면과 리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3606

 

부안고지도/『부안읍지』(1931년)

보안’과 ‘부령’이 합쳐지다
[부안이야기]‘부안’이라는 이름과 부안이 품은 면과 리

‘보안’과 ‘부령’이 합쳐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새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이 어찌 단순하리요! 달걀을 깨고 나오는 고통처럼 여러 방면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이념으로 성리학이 자리 잡았고, 이 성리학을 무기로 양반이라는 지배층이 대두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과전법이란 토지제도가 운용되었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행정구역 정비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主縣)과 주현을 통하여 간접 통치를 하던 속현(屬縣), 그 아래 향(鄕), 소(所), 부곡(部曲)이란 특수한 행정구역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속현과 특수 행정구역은 점차 소멸하며 대부분 지방관이 파견된 군현(郡縣) 체제로 바뀌어 갔지만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이 고려의 5도 양계제를 8도제로 정비하면서 호구(戶口)와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일원적으로 행정 구획화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특히 태종은 8도제를 확립하고, 속현과 향·소·부곡 등을 대부분 정리하였다. 더불어 작은 현의 병합, 군현 명칭의 개정 등 지방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오늘의 부안이 정비되었다. 작은 현에 해당하는 보안현(保安縣)과 부령현(扶寧縣)이 통합되는 형태로 행정구역이 합쳐졌던 것이다. 부안현은 1414년(태종 14) 8월에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부령과 보안의 두 고을 이름에서 앞·뒤 한 자씩을 취하여 부안현(扶安縣)이라 칭하고 현감을 두었다.(『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8월 21일 신유) 이때부터 부안현, 부안군으로 변하면서 부안이라는 지명과 행정구역이 나타났다.
부령은 지금의 부안군 북부, 즉 부안읍·동진면·계화면·행안면·하서면·상서면 일부·주산면 일대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보안현의 별호(別號)는 낭주(浪州)로 속향(屬鄕)으로 고촌(皷村; 현 남쪽 27리), 소(所)로 신덕(申德; 현 동쪽 5리)이 있었다. 보안현의 관할 범위는 지금의 부안군 남부로, 보안면·줄포면·진서면·변산면·상서면 서남부 지역이 포함된다.


부안현에서 부안군으로

그러나 14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안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3월에 태종은 승정원과 6조에 명하여 전년에 병합한 보안을 다시 분리하여 세웠다가(『태종실록』 권28, 태종 15년 3월 25일 계해), 8월에 보안과 부령을 합쳐 부안현으로 하였다. 그리고 1416년(태종 16) 7월에 다시 또 부령과 보안으로 나누었다가(『태종실록』 권30, 태종 16년 7월 30일 기미), 10월에 다시 합쳐 드디어 부안현이 되었다.(『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 10월 10일 무진)
1417년(태종 17)에는 흥덕진(興德鎭)을 폐하고 부안에 이속시켜 부안진이라고 개칭하였으며, 병마사(兵馬使)를 두어 판사(判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1423년(세종 5)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바꾸었다가 곧 다시 현감을 두었다. 이후로 더 이상 부령과 보안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전통 시대의 행정구획은 1895년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실시된 행정구획 개편과 함께 변동되었다. 1895년 5월에 전문 6조의 칙령 제98호로 발표된 지방제도의 대개혁으로 종전의 8도제가 23부제로 개편되었다. 이 개편에서 부·목·군·현의 다양한 행정 단위는 군으로 통일되었고, 23부에는 관찰사 1명씩을 두어 23부와 군의 이원적 구성을 이루었다. 전라북도에는 전주부 20군, 남원부 15군을 두었다. 이 개편에서 부안은 전주부에 속하였고, 종래의 부안현에서 부안군으로 바뀌었다.
23부제의 지방제도는 1년여 만에 폐지되고, 이듬해인 1896년 8월 칙령 제36호로 공포된 「지방제도관제봉급경비개정의 건」에 의해 다시 개편되어 13도제로 개편되었다. 이때 오늘날과 같은 13도제를 취하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분리되었고, 전라북도는 26군을 관할하였다. 당시의 26군은 전주, 남원, 고부, 김제, 태인, 여산, 금산, 익산, 임피, 금구, 함열, 부안, 무주, 순창, 임실, 진안, 진산, 만경, 용안, 고산, 옥구, 정읍, 용담, 운봉, 장수, 구례군이다.


▲『여지도』(1730년대)에 보이는 부안


지리지에 보이는 부안의 위치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단종 2)에 의하면 부안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김제까지 11리,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60리, 남쪽으로 흥덕까지 37리, 북쪽으로 만경까지 11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중종 25)에서는 동쪽으로 김제군의 경계까지 13리, 남쪽으로 고부군의 경계까지 18리, 흥덕현의 경계까지 52리, 북쪽으로 만경현의 경계까지 12리, 서쪽으로 바닷가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양자 간의 기록을 보면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세종실록』 「지리지」보다 세밀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부안현의 경역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두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 대략적인 부안현의 위치와 모양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1765년, 영조 41)에서는 부안의 경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쪽으로 김제군의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 바닷가까지 60리, 남쪽으로 고부군의 경계까지 18리, 북쪽으로 만경현의 경계까지 20리이다. 북쪽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540리로, 엿새 가는 거리이다. 동쪽으로 감영(監營)까지 100리로, 하루 가는 거리라고 하였다.


행정구역이 ‘면’과‘리’로 확대되다

한편, 조선은 건국 초부터 면리제(面里制)를 지향하여 이전의 촌(村)을 면으로, 자연촌을 리(里)로 바꾸고 이를 호수(戶數)를 기준으로 편제하였다. 그리하여 5호를 1통(統), 5통(25호)을 1리로 하고 통에 통주(統主), 리에 이정(里正)과 이장(里長)을 두었다. 다만 면은 호수를 규정하지 못하고 매 1면에 권농관(勸農官) 1인을 두되 땅이 넓고 호수가 많으면 이를 늘리도록 했다.
이처럼 면리제는 군현 아래의 촌락을 직접 관리하기 위해 실시한 새로운 마을단위체제이다. 면리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반포와 함께 법제화되었지만 조선 전기에는 아직 면은 방위면(方位面)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고, 리도 자연촌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면리제의 기능에 많은 한계를 가졌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강화되고 한편으로 자연촌이 성장함에 따라 전기의 방위면 체제가 해체되고 방위면 아래의 리가 면으로 승격하면서, 그 아래의 몇 개의 자연촌이 모여 리로 편제되었다. 비로소 면리제가 명실상부한 행정 체제로서 확립된 것이다.


부안의 ‘면’과 ‘리’

부안의 면 명칭과 이에 포함되는 동리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명칭의 확인된다. 부안 관할 지역 소속의 면별 명칭을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여지도서』이다. 여기에는 동도면, 상동면, 염소면, 서도면, 하서면, 우산내면, 상서면, 남상면, 남하면, 하동면, 소산면, 입상면, 입하면, 건선면, 좌산내면, 이도면, 일도면 등 17개 면이 보인다. 또한 이보다 30여 년 늦은 『호구총수』(1789년, 정조 13)에는 18개 면이 보이는데 『여지도서』에 있는 면들에 용연면이 추가된 것이다.
『호구총수』에 보이는 부안의 리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마을의 이름을 대략 유추해 낼 수 있다. 따라서 아래 표를 보고, 현재의 지명과 당시의 지명을 비교해보는 재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박정민(전북대학교 강사)

<부안이야기 12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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