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소나무
“부안, 전함을 만들다”
[부안이야기] "바닷가의 재목을 거의 벌목해 버려"
고려, 몽골의 침략을 받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 건설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급변하였다. 몽골은 금을 멸망시키고 고려와도 충돌을 일으켰다. 고려 고종 5년(1218) 몽고군이 거란족을 쫓아 강동성(江東城)에 이르면서 양국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양국은 형제 맹약을 체결하면서 화친을 맺었지만, 고종 12년(1225)에 고려에 사신으로 온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살해되면서 양국의 평화 관계는 깨져버렸다. 몽고의 고려 침입은 고종 18년(1231) 8월부터였다. 당시 몽골의 주요 목표는 중원 지방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것이었고, 고려 침공은 그러한 동방 전략의 한 형태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는 전 지역이 전쟁터로 변해갔다. 부안이 포함된 호남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고종 23년(1236) 하반기 충청 북부 지역에 침입하였던 몽골군은 전라도 북부 지역까지 남진하였는데, 이들 몽고군은 곡창지대를 횡행하며 특히 식량의 확보를 위해 이 지역에 대한 약탈을 일삼았다. 당시 전라도 지방에 몽골군이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달단(韃靼)이 강남(江南)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라는 이규보의 시가 『동국이상국집』에 남아 있다.
북쪽 풍속이 남쪽에 익숙지 못한데
어찌하여 염주(炎洲)로 들어갔나
차마 만민의 밥으로
한 나라의 원수를 살찌게 하랴
영성(嬰城)이 비록 상책이지만
청야(淸野)도 좋은 계책이리라
어떻게 천상의 칼을 가져다가
단번에 오랑캐 머리를 자를까
시퍼런 칼날로 모조리 떨어뜨려
둥근 공 차듯 굴려 버릴까
아니면 큰 바닷물을
갖다 대어 떠내려가게 하고
고기와 자라가 되게 하여
회 쳐서 우리 백성 먹게 하려나
이 말이 오활하기는 하지만
하늘의 뜻이요 사람 꾀는 아닐세
바라옵건데, 옥황상제는
화난을 뉘우쳐 다 죽이지 마시오
아 무엇을 더 말하리요
흐르는 눈물 그칠 줄 모르네
고려시대 전라도를 ‘강남도’라 불렀기 때문에 이규보는 몽골군이 전라도에 침입한 것을 달단이 강남으로 들어갔다고 표현하였다. 달단은 타타르(Tatar) 즉, 몽골인을 말한다. 염주(炎洲)는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불(火)이 둘이나 겹쳐 있는 그만큼 뜨거운 곳임을 의미한다. 추운 몽골 고원과 비교한 것이다. 이규보는 몽골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는데, 그는 농성하면서 성을 굳게 지키는 영성(嬰城) 전술도 좋지만 만약 힘에 부쳐 그 전술이 어렵다면 들판에 있는 풀과 나무 및 곡식이나 인가까지도 모두 제거해서 들판을 텅 비워 적에게 식량을 제공하지 않는 청야(淸野) 전술도 좋은 계책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그만큼 몽골군을 상대로 직접 전투를 벌이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을 이규보가 인정하였음을 말해준다.
『고려사』에는 1236년 10월에 몽골군이 전주와 고부(古阜)의 경계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고부는 부안과 인접한 곳으로 부안 지역까지 몽골의 침입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때 부령별초(扶寧別抄)로 의업(醫業)에 응시를 했던 전공렬(全公烈)이 고란사(高蘭寺) 산길에 숨어 있다가 몽고 기병 20명을 공격하여 두 사람을 죽이고, 병기와 말 20여 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공으로 전공렬은 본래의 업인 의업으로 종사하도록 하는 특전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사례로 볼 때, 부안 지역에서도 현지인들의 유격전이 빈번하게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지만, 전투의 성격상 기록에 남겨지기 어려웠다고 판단된다.
당시 몽골의 침입에 의해 지방 사회가 처참한 피해를 입었음은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심하구나, 달단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음 또한 금수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佛法)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때문에 그들이 경유하는 곳에는 불상과 범서(梵書)를 마구 불태워버렸습니다.”(『동국이상국집』 권25)
이 글은 고종 24년(1237)에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부인사가 심하게 파손된 사실을 언급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몽골이 지역의 사찰까지 모두 파괴할 정도로 각 지역을 유린하였음을 알려준다.

▲『대동여지도』(1861년, 김정호, 규장각한국학연구소)/여·몽연합군의 전함 건조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모포
몽골 침입과 부안
몽골군은 고종 43년(1256) 3월부터 대략 7월까지 수개월 동안 전라도 남부 지역에 그 전력을 집중시켰다. 이 당시 몽골군은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부대로 고종 42년(1255) 8월부터 고려 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몽고의 척후병이 강화 북쪽 맞은편인 승천부에까지 이르자 강도는 계엄이 선포되기도 했다. 이후 몽골군은 10월 초에 영남과 호남의 경계인 대원령에서 충주군의 유격에 의해 큰 타격을 받으면서 경상도로 나아갔는데, 차라대의 본군은 이듬해인 고종 43년(1256) 초부터 전라도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그로 인해 전라도 일대에서 전쟁이 빈발하였다. 몽고군은 이 해 초부터 여러 섬의 공격을 꾀하였는데, 종래 본토 내륙에 대한 공성전만을 주로 하던 몽고군이 적극적으로 해안의 섬에 대한 침공으로 전략을 바꾸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고려가 백성들을 섬 안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하고 육지는 비워두는 해도입보(海島立保) 책을 펼치자, 이에 대한 몽골군의 대응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고려 조정은 이광(李廣)과 송군비(宋君斐)에게 수군 3백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이를 막게 했다. 3월에는 몽골군의 일부가 전라도 영광 일대에 주둔하였는데, 고려의 이광은 수군으로, 송군비는 내륙으로 협공하는 작전을 사용하여 공격하기로 하였다. 당시 송군비의 군은 부안 줄포에 상륙하여 전력을 보강하고 영광으로 진입을 시도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몽고 병사들이 이를 미리 알고 방비하자, 이광은 다시 섬으로 들어가고, 송군비는 지금의 전북 정읍과 전남 장성의 경계에 위치한 입암산성(笠巖山城)에 들어가 지키게 되었다.
입암산성은 호남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입보처로서 당시 주변의 군현에서 다수의 아전과 백성들이 병란을 피하여 들어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성중의 장정들이 모두 몽골에게 투항하고, 오직 늙고 어린 사람만 남게 되었다. 송군비는 거짓으로 파리하고 약한 몇 사람을 성 밖에 내보내 적의 눈에 띄게 만들었다. 야윈 사람들을 본 몽골군들은 입암산성 내의 양식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방심한 채 군사를 끌고 성 아래에 이르렀다. 이러한 틈을 타, 송군비가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몽골이 성 안의 곡식이 다 소진되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봐서, 장기간에 걸쳐 전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전투에서 ‘관인(官人)’으로 표현된 적의 고급 장교 4인을 포로로 잡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려군의 대승으로 끝났음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송군비가 입암산성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는 보안 지역의 아전과 백성들도 많이 피해 있었을 것이며, 검모포 지역의 병사들도 동원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검모포(지금의 진서면 진서리 구진마을)
부안, 전함을 만들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이후에도 부안과 몽골의 인연은 이어졌다. 원의 일본 정벌에 전선을 만드는 작업을 부안에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은 다음 기록을 통해 볼 수 있다.
원 세조가 일본 정벌을 계획하면서 전함과 군량, 무기를 모두 고려에서 책임지고 마련케 명령을 내린 후 원수 흔도(忻都)와 우승 홍차구(洪茶丘)를 보내 감독하게 했다. 왕과 신하들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명령을 따를 뿐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고려사』 권106, 열전19 박항전)
원 세조 쿠빌라이가 전함과 군량, 무기 준비를 모두 고려에 떠맡겼던 것이다. 임금과 신하들은 원나라의 요구가 부당하지만,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 정벌을 일찍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일본을 불러 타이르는 한편 고려에 압력을 가하여 병선 건조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원종 9년(1268) 4월 기록을 보면, 이장용(李藏用)에게 군사를 보내 전쟁을 도울 것을 명령하면서 남송이나 일본으로 가고자 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남송이나 일본을 가기 위해서는 좋은 배는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같은 해 10월에도 원이 원종에게 보낸 글에도 수군으로 남송을 칠는지, 아니면 그 대상이 일본이 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원의 빗발치는 독촉과 강압에 일본 정벌의 준비를 마친 고려는 1274년에 대장군 나유(羅裕)를 원나라에 보내어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하였는데 나유가 원의 최고 의정기관인 중서성에 서면으로 제출한 보고에는 변산과 나주의 천관산에서 함선을 건조하였다고 밝혔다. 당시 대충의 상황은 다음 기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신유[辛酉]에 대장군 나유를 원에 파견하여 중서성에 글을 보내기를, “금년 정월 3일에 귀국 조정의 지시를 받고 즉시 큰 배 300척을 만들도록 조치를 취하고 추밀원 부사 허공(許珙)을 전주도 변산(邊山)에, 좌복야 홍녹주(洪祿遒)를 나주도 천관산(天冠山)에 파견하여 재목을 준비하게 하였다. 또 시중 김방경(金方慶)을 도독사로 임명하고 그 관할 하의 관원, 장령들도 모두 우수한 인재들로 뽑았으며 또 필요한 인부, 장인들과 자재들도 모두 국내 각지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재촉 보장하도록 하였다.
그 후 정월 15일에 모두 한 곳에 모으고 16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5월 그믐에 공사를 끝내니, 큰 배와 작은 배 도합 900척을 완공하였으며, 사용하여야 할 물건도 또한 모두 원만히 구비되었기에 3품관 중에서 유능한 사람들에게 분공하여 뱃머리를 돌려 이미 김주(金州)로 향해 떠나게 하였다. 여러 재상들은 황제에게 잘 보고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고려사』 권28, 충렬왕 원년 6월 신유)
몽골이 고려 조정에 1274년 정월 3일에 전함 건조를 지시하자, 고려는 허공을 부안 변산에, 홍녹주를 장흥 천관산에 보내 재목을 준비하게 하였으며, 같은 달 15일에 재목과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16일부터 전함 건조를 시작하여 5월 30일에 공사가 끝났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원은 1274년 정월 2일에 총관(摠管) 차쿠(察忽)를 보내어 전함 3백 척을 감독하게 하였다. 원이 병선을 건조하려는 것은 일본 정벌을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런데 병선 건조에 필요한 장인들과 역군 및 일체 자재들은 전부 고려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원은 소용대장군 홍차구를 감독조선관 군민총관(監督造船官軍民摠管)으로 임명해 전함 건조를 감시하도록 하였다. 홍차구가 정월 6일에 고려에 보낸 편지에는 배 만드는 데 필요한 장인들과 인부들 그리고 기타 재목 등의 물건을 허공(許珙)과 홍녹주(洪祿遒)에게 맡겨 조달하도록 하였다. 고려는 허공을 변산에, 홍녹주를 천관산에 파견해 마련하도록 하고, 김방경(金方慶)을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임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홍차구는 정월 15일에 전함 건조를 착공토록 하고 심하게 독촉하였다. 이에 고려는 홍차구의 요구대로 대장군 나유(羅裕)를 전라도, 김백균을 경상도, 박보를 동계, 국자사업 반부를 서해도, 임개를 교주도에 각각 보내어 부부사(部夫使)로 삼아 공장(工匠)·역도(役徒) 3만 5백여 인을 징집해 조선소에 보내도록 하였다. 당시 연락을 주고받는 역마가 끊이지 않고 오고갔으며, 여러 가지 일들이 매우 번거롭고 바빴는데, 기한에 맞추기 위해 급박하게 몰아치기를 바람과 번개같이 해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전함 건조 사업이 고려 전체의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부안에서 전함 만든 곳은 어디였을까
부안 내에서 전함 건조를 맡았던 장소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기록의 미비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변산에서 잘라낸 목재를 운반하기 가까운 곳에 위치한 포구였을 것임은 명백하다. 아울러 건조한 900척의 배가 안정적으로 정박할 공간이 필요한데, 그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지역으로는 지금의 곰소만 지역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은 넓고 길쭉한 만을 이루어 잔잔한 물결과 깊은 수심 그리고 널찍한 뻘밭이 존재한다. 진서면 진서리 곰소 동편의 구진마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 검모포가 위치하였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부안 지역에 유일하게 병선이 정박하는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사정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이 전함 건조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38년에 구진마을 바로 옆의 곰섬와 범섬을 인공적으로 매립 연결하여 곰소항을 개설하였는데 이때 매립공사를 하면서 검모포 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 입구의 갯벌 속에서 수백 년 동안 바다 뻘 속에 묻혀 있던, 배를 건조할 때 밑에 까는 깔이목인 못탕목이 많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아마도 당시 전함 건조의 중심은 검모포 지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는 2월에 별장 이인(李仁)을 원의 중서성에 보내 고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했다. 고려는 전함 300척의 건조가 쉽지 않을 것임을 토로하였다. 고려는 3만 5백 명에게 세끼 식사량, 총 34,312석 5두의 식량과 흔도 군이 휴대할 1,570석, 홍차구 군의 85석, 제주도 관군과 고려 군사 1,400명의 7개월간의 군량 2,904석, 월루활단치의 군량 8,000석과 마량 1,325석 그리고 봉주 둔전군의 부족분인 2,047석 등의 공급을 고려가 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언급하며, 면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원은 3월에 다시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일본 정벌에 참여할 군사 5천 명을 요구하며, 고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3월 병술일에 원나라에서 경략사 왕총관(王總管)을 파견하여 군사 5천 명을 징발하여 일본 정벌을 원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전라주도에서 선박 건조의 일군들 3만 5백여 명과 홍차구가 거느린 감조군(監造軍)을 위한 군대들에 대한 공급이 부족해서 동경과 진주도에 주려고 한 계유년분의 녹봉들을 운반해다가 주었다. 왕은 백성들의 요역(부역)이 너무 번거롭고 수송까지 부담하는 폐단이 많아 농사일을 방해하는 것을 근심하여 상장군 이분희(李汾禧)를 홍차구에게 보내 그를 설복하고 부역 나온 백성의 절반을 고향에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 하자고 제의하였더니 홍차구도 이를 시인하고 배 두 척마다 쌍정(雙丁) 50명만 남기고 그 나머지 단정(單丁)은 모두 돌아가서 농사짓게 하였다.(『고려사』 권28, 충렬왕 2년 3월 병술)
3월에 원에서 사신을 보내와 군사 5천 명을 징발하여 일본 정벌을 돕도록 명하였다. 이때 전라주도에서 배를 만드는데, 홍차구가 거느린 배를 만드는 군대인 감조군(監造軍)의 공급이 부족하여 동경과 진주도내의 쌀을 실어다 주었다. 왕이 요역의 번거로움과 수송하는 폐단이 농사일에 방해가 되는 것을 근심하여 상장군 이분희(李汾禧)를 보내어 가서 홍차구를 달래니, 홍차구가 자못 옳게 여겨 배 한 척마다 5십 명을 남기고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 농사짓게 하였다.
고려의 호등제(戶等制)는 3정을 최하 단위인 하호(下戶)로 하며, 여기에 2배인 6정까지를 중호, 3배인 9정까지를 상호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 각각을 다시 3등분한 상상호(上上戶)부터 하하호(下下戶)에 이르는 9등호제를 시행하였다. 하하호인 단정과 하중호인 쌍정은 원칙적으로 역이 면제되었다. 그럼에도 몽골은 단정까지도 징발할 정도로 노역 동원을 심하게 했음을 말해준다.
여하튼 고려는 5월 30일에 공사를 끝내서, 큰 배와 작은 배 도합 900척을 완공하였다. 1274년 10월에 몽골과 한인(漢人)군 2만 5천명과 고려군 8천명이 연합하여 일본 정벌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큰 태풍을 만나 많은 전함과 병사를 잃고 철수했는데, 죽은 자가 13,500여 명에 이르렀다.

▲구진마을생활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바탕목/1938년에 구진마을 바로 옆의 곰섬와 범섬을 인공적으로 매립 연결하여 곰소항을 개설하였는데 이때 매립공사를 하면서 검모포 진영이 있었던 구진마을 입구의 갯벌 속에서 수백 년 동안 바다 뻘 속에 묻혀 있던, 배를 건조할 때 밑에 까는 깔이목인 못탕목이 많이 발굴되었다.
원의 끊임없는 요구
1차 침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는 일본 침공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고려로 하여금 전함, 군수물자 등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는데 이후 일본은 더욱 완강하여져 두 차례나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죽이고 규수의 하카다(博多)에 몽골 방어의 성벽을 쌓는 등 대비를 하였다. 고려는 충렬왕 원년(1275) 정월에 몽골의 일본 정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우리나라는 근래에 역적들을 토벌하는 일과 많은 군사들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로 인하여 이미 수 년 간에 걸쳐 집집에서 징수하였고 게다가 또 왜를 정벌하기 위해 전함을 건조하는데 장정들은 모두 그 역사에 동원되었다. 그리해서 늙은이들과 약한 자들만이 남아서 겨우 밭갈이와 씨 뿌리는 일을 하였으나 처음에는 가뭄이 들고 나중에는 홍수가 나서 곡식이 여물지 못했다. 그래서 국가의 수요를 빈민들에게 징수하는데 몇 말 몇 되에 이르기까지 모두 쌀 항아리를 털어서 바쳤으므로 벌써 나무 열매나 풀잎을 먹는 백성들이 있다. 아마도 백성들의 영락과 피폐가 지금보다 심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출정 군인으로서 부상하였거나 물에 빠져 죽고 귀환하지 못한 자들이 많으므로 비록 남은 인민들이 있기는 하여도 한 달이나 일 년에 그들이 소생하여 숨 돌리기를 바랄 수는 없게 되었다. 만약 일본 정벌을 또다시 일으킨다면 그 역사에 소용되는 전함들과 군량은 실로 우리나라에서는 공급할 능력이 없다. 결국 나라가 파멸되어 없어지게 될 것이니 응당 그렇게까지 되었겠느냐고 말할 것이나 나의 간절한 호소를 양해하여 주기 바란다.(『고려사』 권28, 충렬왕 원년 정월 경진)
삼별초 토벌 이후 일본 정벌 등에 장정들이 많은 시간 동원되고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농업 생산력이 감소했고 그나마도 국가사업의 필요로 인해 징수가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고려는 몽골의 일본 정벌이 다시 이루어지면 전함 건조와 군량 조달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고려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약간의 과장도 병행했다.
하지만 고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충렬왕 원년(1275) 11월에 원은 사신을 고려에 보내 병장기를 제작하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일본 침략과 관련된 명이었다고 판단된다. 이에 고려는 같은 달에 기거랑 김제(金磾)를 원 사신과 함께 경상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백성들에게서 화살을 만들 깃과 활촉을 만들 철을 거두게 하기도 하였다. 화살 제작에 전라도 지역도 포함되어 있는데, 대나무가 특산물인 부안 지역도 이 작업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은 충렬왕 2년(1276) 정월 병자에 쿠빌라이가 전함 건조와 화살, 활촉 제작을 그만 두게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는데, 전함 건조는 부안 지역이 1순위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1275년 11월부터 전함 건조와 관련된 일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이해해도 크게 착오는 아니다. 1276년 10월 기록을 보면, 원이 합포진변소의 초공과 수수들을 해산하고 서해도에 있는 귀부군에게 자체적으로 식량을 마련할 것을 명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에 일본 정벌이 잠시 보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몽골은 충렬왕 5년(1279)부터 다시 일본 정벌을 준비했다. 『원사』를 보면, 쿠빌라이는 이 해 2월에 일본 정벌을 위해 양주(揚州)⋅호남(湖南)⋅공주(贛州)⋅천주(泉州) 4성에서 전함 6백 척을 건조하게 하였고, 6월에는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서 소출되는 재목을 이용해 그 땅에서 만들라고 하였다. 『고려사』에도 충렬왕 5년(1279) 6월 신축일 노영이 의원 2명과 함께 원에서 돌아와서 동정원수부에서 성의 명령을 받고 전함 900척을 만들라고 통고하여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먼저 중국 남부 지역에서 배를 건조하게 했다가 고려도 동참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명확치 않다. 앞선 정벌에서 고려의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중국 남부 지역에서 배를 건조하게 만들었다가 시간 부족 등으로 고려도 참여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기록이 참고가 된다.
“강남(江南)의 전선은 크기는 하나 무엇에 부딪치면 쉽게 파괴되기 때문에 먼저 번에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고려로 하여금 전선을 만들게 하여 다시 정벌한다면 일본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려사』 권30, 충렬왕 18년 8월 정미)
충렬왕 18년(1292)의 기록이지만, 중국 강남 지역에서 건조하는 전함이 단단하지 않아 쉽게 파괴된다는 언급이 주목된다. 변산 등 고려에서 배를 건조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이유를 알려준다. 그만큼 고려 배의 성능이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그로 인한 고통을 부안 지역이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선박 건조는 충렬왕 20년(1294) 정월에 쿠빌라이가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러한 사정과 관련해서는 다음 기록이 도움을 준다.
당시 임금이 입조해 일본 정벌의 불합리성을 설명했으며, 또한 갑술년과 신사년 두 번에 걸친 원정으로 바닷가의 재목을 거의 벌목해 버려 전함의 건조가 사실상 곤란하므로 기한이라도 연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마침 황제가 죽었으므로 홍군상이 승상 올제이(完澤)에게 건의해 마침내 일본 정벌이 중지되었던 것이다.(『고려사』 권8, 충렬왕 20년 정월 계유)
쿠빌라이는 죽기 전까지 일본 정벌을 시도하였다. 그로 인해 지속적인 전함 건조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충렬왕은 원 조정에 가서 일본 정벌이 곤란한 것과 또, 갑술년 즉, 1274년과 신사년 즉, 1281년 두 해에 있었던 정벌로 인하여 하천과 바닷가의 재목은 거의 다 벌채하였기 때문에 전함 건조가 아주 곤란하다고 말하며 그 기한이라도 연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부안 변산의 피해가 매우 컸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홍군상은 승상 올제이에 일본 정벌 중지를 건의하였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쿠빌라이가 사망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더 이상의 전함 건조가 중단되었고 부안민들도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사』 등에는 당시 부안의 피해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차례에 걸쳐 이뤄진 선박 건조는 변산 등의 산림을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함 건조에 동원된 부안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매우 큰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허인욱(인하대학교 연구교수)
<부안이야기 12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