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07-19 (15:08)
유기농 공동체 ‘산들바다’ 를 잊지 못하는 이유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2759

 

▲유기농공동체 ‘산들바다’ 회원들이 마포 들에서 손모내기를 하고 있다.


 

변산에서 20년 농사짓기, 잘 산 거지요?
유기농 공동체 ‘산들바다’ 를 잊지 못하는 이유

 

 

일하는 사람들은 한해 농사가 끝나도 쉬지 못하고 내년 농사를 위해 품목 선정과 농사 일기를 매번 매만집니다. 농사일은 때가 있는 거라서 제때 손발을 움직여 미리 준비해야 내년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익숙치 않습니다. 논밭의 농작물들이 늘 눈에 밟히니 글 쓸만한 여유도 없지요. 고민은 되지만 제가 겪은 얘기를 말하듯이 평안하게 써보렵니다.

비오는 날 아침은 달달해요

농부에게 비오는 날 아침은 달달합니다. 오늘이 그러네요. 새벽녘 잠결에 지붕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아침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밀린 청소와 빨래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도 들어야지’
특별히 정해진 휴일이 없는 농번기에는 비오는 날이 노는 날입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늦둥이 유치원까지 보내고 나니 ‘띵동’하고 폰이 울립니다.
“비 오시는데 언니들 뭐하삼?”
“신랑들이랑 재밌는 계획 있는 거 아니면 수제비나 끓여 먹을까요?”
막내 회원 은경이가 제일 먼저 마음을 씁니다.
“좋아 좋아” “딱 내 맘이네”
산·들·바다 공동체 여성생산자 그룹채팅방이 요란합니다. 이렇게 쉬는 날이면 힘든 농사일에 지쳤을 서로의 처지를 알기에 누구든 먼저 나서서 얼굴 볼 일을 만듭니다. 집에서 농사지은 농산물로 솜씨를 발휘해 부침하는 사람, 빵 찌는 사람, 아껴둔 밑반찬 내오는 사람 등 한상 그득 차려집니다. 함께 모여 신랑 흉도 보고 아이들 걱정에 농사 이야기까지 한보따리 풀어 놓다보면 어느새 서로를 격려하고 감싸주며 한 몸이 됩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여 홀가분하게 모이지만 예전에는 아이들을 함께 키우며 한 식구처럼 지냈습니다. 지금의 산·들·바다 공동체에서 귀농한 대부분의 회원들은 연령대가 비슷하여 아이들도 같은 또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공동육아를 하게 되었지요. 육아에 대한 생각들도 비슷해 아이들을 늘 자연에서 뛰놀게 했습니다. 산과 바다와 들과 함께 엄마도 아이도 함께 커갔습니다. 아이들은 늘 흙범벅된 신발과 옷, 검게 탄 얼굴에 콧물을 달고 다니는 그야말로 촌놈 촌년들이었습니다. 그때가 변산에서 20년 생활 동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덕에 우리 아이들 모두는 맑은 영혼을 가진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했지요.
유기농을 한다는 것은 농사 그 이상의 삶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농약과 화학비료 없이 유기재배로 농사를 짓는 일은 그 자체가 공동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부터 벌레와 고추, 배추, 호박과 사람까지 모두를 살려야 하는 농사이니까요. 나 혼자 잘 살기보다 땅도 사람도 함께 살기 위한 농사이기에 이기심을 갖거나 돈을 좇는다면 해낼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공동체는 유기농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란 생각이 듭니다.


▲유기농 공동체 ‘산들바다’ 창립총회(2004.3.24)

낫과 호미를 첨 본 사람이 농사를 짓겠다고?

제가 공동체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년 전인 1996년 ‘변산공동체’를 방문하면서입니다. 미래가 없는 도시 생활을 접고 새로운 삶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 방문했습니다. 낫과 호미의 실물을 처음 본 저에게 그곳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그해 가을 벼를 추수하는데 다른 논에서는 콤바인 소리가 요란한데 공동체 논에는 침묵의 낫질만 며칠 계속되었습니다. 낫질이 서툰 도시내기들이 모여 수확을 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대부분은 한 번에 베는 낫질이 아니라 톱질처럼 몇 번에 걸쳐 베는 겁니다. 그때 얼마나 힘들던지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그 이후로도 고추 따고 콩을 베며 힘든 노동에 엄두가 나지 않을 때쯤 선하면서도 강단이 있어 보이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이 사람이라면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시골 살림을 어느 정도 배우고 익히게 되었을 때쯤 공동생활을 하는 변산공동체에서 분가해 개별 농가를 꾸리게 되었습니다. 젊음이 밑천이라 별 두려움 없이 나오긴 했는데 막상 독립해서 농사지으려 하니 모든 것이 서툴고 부족하였습니다. 공동체에서는 여럿이 함께 일을 하니 힘도 덜 들고 좀 못하더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 수월했는데 분가해 보니 손바닥 만한 땅도 망망대해 같았어요.
변산면 지서리 지동마을에 터를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재실 땅 3,000평 중 600평 남짓한 밭으로 처음 농사를 시작했는데 고추 500주, 감자 200평, 고구마, 콩, 팥에 마늘 등 조금씩 쪼개어 심어 놓으니 동네 분들이 ‘백화점’하냐고 웃더군요. 일머리도 없는데다가 작물의 종류는 많지, 아이들은 어리기까지 하니 매일매일 부지런히 일해도 늘 일에 쫓기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조급한 마음에 돌이 지난 딸을 밭고랑에 놓아둔 채 고추밭을 매고 있는데 아이가 조용해서 돌아보니 고추를 똑똑 분지르며 따라 오더라고요. 저의 조급한 마음이 작물을 버리게 했지요. 첫해 수확물이라고는 고추 10근과 감자 30박스, 고구마 먹을 만큼이었습니다. 그 길로 남편은 돈벌이하러 찬바람 맞으며 막일을 겨우내 다녔습니다.


▲산들바다 공동체 회원들의 야유회


▲공동체 아이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아들 종웅


▲공동체 회원들이 울력으로 집을 짓는 모습


산들바다 공동체를 잊지 못하는 이유

우여곡절을 겪으며 농사일이 익어가고 수확물이 많아지니 이번에는 판로가 문제였습니다. 지인들을 통한 판매는 한계가 있어 고민하고 있을 때 철없는 귀농부부의 손을 잡아준 분들이 지금의 ‘산·들·바다 공동체’ 선배들입니다. 유기농업에 대한 인식이 태동되었던 80년대에 변산 지역에서 농민회 활동을 하던 몇몇 분들이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죽어가는 땅을 살리는 길이 자연과 사람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알고 유기농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유기농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라 함께 농사짓는 가족이나 마을 분들과 갈등이 많았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농약을 치지 않는다고 경찰에 고발까지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고요.
그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렀는지 숙연해질 때가 많습니다. 선배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어려운 형편인데도 귀농한 젊은 사람들의 정착을 위해 애썼습니다. 농사일도 가르쳐 주고 농산물을 출하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몫을 나눠 주며 공동체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아 무엇으로라도 보답해 드리고자 했더니, “우리가 당신들 돕는 것은 다음에 오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고 하던 말을 지금도 마음속에 담고 삽니다.


▲유기농 공동체 ‘산들바다’ 도시 소비자와 만남


▲유기농 공동체 ‘산들바다’ 천연 물들이기 체험


▲유기농 공동체 ‘산들바다’ 한살림 단오 한마당


▲유기농 공동체 ‘산들바다’ 회의/매달 정기적으로 모여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평등한 조건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한다.


유기농과 도시 소비자의 만남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개척한 지역토박이 농부 아홉 가구와 귀농한 여덟 가구가 만나 지금의 ‘산・들・바다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산·들·바다 공동체는 전 농토를 유기농으로 지어야 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소 문턱이 높다는 분들도 있으나 쉽게 가는 길을 택한다면 어려운 길을 빨리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유기농 자체가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라 견고한 원칙을 가져야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제는 유기농 환경이 많이 좋아져서 좋은 퇴비도 구하기 쉽고 병충해를 방제할 수 있는 천연 자재도 많이 나와서 예전보다 유기농사가 많이 용이합니다.
쉬워진 만큼 농사 규모도 조금씩 넓혀져 미생물과 벌레가 함께 사는 땅들이 많아졌습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는 모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매달 정기적으로 모여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평등한 조건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합니다. 의견의 차이도 생기고 개인 위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합의를 만들어 갑니다. 결정된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지요. 각각의 모든 회원들이 역할을 나누어 맡고 있는 것도 공동체의 좋은 점입니다. 어떤 모임이든 주도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 위주로 모임이 만들어지는데 산・들・바다 공동체는 모두가 주인이기에 자기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농산물을 출하하는 데서도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갖습니다. 같은 품목을 희망하는 모든 농가가 재배하여 공동 출하합니다. 농산물은 시장에다 파는 것이 아니라 생협(한살림)을 통해 소비자와 직거래합니다. 그래서 소비자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공동체 회원들은 정직하게 농사지어 도시 소비자들의 밥상 살림을 책임지고 소비자들은 생산자들의 생활을 보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도시의 아이들이 농장에 와서 모내기도 하고 고추도 심으며 땅에서 사는 생명들의 소중함을 배웁니다. 이들이 이 다음 우리 농촌을 살릴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하나 정성들여 알려줍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도시의 엄마들도 많이 옵니다. 유기 농산물로 생명의 밥상을 차리시는 분들이기에 생산자인 저희들에게 늘 감사함을 전합니다. 저희도 농사지은 것들을 책임지고 소비해 주는 그분들이 있어 든든합니다.


▲변산골프장 반대/여의도 국회 앞에서


▲부안핵폐기장 반대/삭발하고 있는 필자


공동체의 위기, 골프장 건설에서 핵폐기장까지

군수 당선자는 선거 전에는 유기농을 배려하고 지원하겠다고 그린필드 시스템(Green Field System)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당선되자마자 상황은 싹 달라졌습니다. 유기농 농사짓는 산언저리에 골프장을 짓겠다는 겁니다. 뒤통수를 맞은 거지요. 유기농 자체를 하지 못할 상황으로 내몰린 겁니다. 공동체 사람들은 골프장 반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옷에다가 골프장 반대를 새기고 마라톤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이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안에다 핵폐기장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2003년이었지요. 그때 우리 부부는 농사가 힘들지만 재미를 붙이고 아이들과 변산에서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던 때였습니다. 공동체 사람들은 핵폐기장 반대 운동에 여러 모양으로 나섰습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회원들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했습니다. 농사는 뒷전이었고 이 일을 어쩌든지 끝을 내야 일이고 뭐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핵폐기장 문제는 공동체 사람들의 삶터와 직결되는 문제였습니다.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환경파괴로 이어지고 이곳에서 농사짓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핵폐기장이라는 큰 이슈가 터지면서 골프장 문제는 자연스럽게 묻혀버렸습니다.
핵폐기장 반대에 나섰던 공동체 여성회원 7명은 머리를 깎는 삭발에도 나섰습니다.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지요. 전주까지 삼보일배로 참여한 여성회원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생겼는지 되묻곤 합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지역에 핵폐기장이 와서는 안 된다는 문제를 넘어서 후손들의 삶을 생각하며 환경을 더욱 고려하는 쪽으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핵폐기장 반대 운동에 나서면서 지역 분들과 관계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전에는 젊은 사람들이 이곳까지 온 이유가 뭘까?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이웃들은 우리들의 진정성 있는 삶을 인정하고 호의적이며 유기농에도 관심을 갖는 쪽으로 변했습니다.


▲왼쪽부터 필자, 딸 아침이슬, 남편, 아들 종연, 종웅

오랜 시간 함께 할 땅과 사람들

공동체 생활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일반 농사짓는 것보다 번거로울 때가 많습니다. 까다로운 인증 절차로 인해 퇴비나 자재 사용, 주변 농경지와 경계지 관리 등을 늘 신경 써야 하고 윤작과 다품목 재배로 인해 단작에 비해 많은 노동력이 듭니다. 또한 교류활동, 각종 조직 모임 등 농사 밖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지지고 볶고 싸우는 날도 많습니다. 여럿이 모여 하는 일이니 이해관계로 대립될 때도 있고 모든 사람의 형편을 배려할 수 없는 한계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갈등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통해 모두가 만족스럽고 올바른 상태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지요. 모두가 오랜 시간을 함께할 것이니까요.
내년이면 변산에서 농사지은 지 20년이 됩니다. 그동안 터 잡은 지동마을에서 흙벽돌 5,000장을 직접 찍고 3년에 걸쳐 우리 손으로 집도 지었습니다. 아직도 일이 무섭지만 조급해 하진 않습니다. 흐름에 맡기고 순리에 따르다 보면 다다르는 곳이 있겠지요. 20년이나 선한 모습 그대로인 남편과 맑은 품성을 가진 아이 셋과 함께 울고 웃을 공동체 식구들이 있으니…
“변산에서 20년, 잘 산거지요?”

/정명미(산들바다 공동체 회원)

<부안이야기 12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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