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10-26 (15:01)
[부안문화재답사-44] 보물 제900호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2434

 

부안김씨종중고문서(보물 제900호) 유물관ⓒ부안21


"그대는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가 뛰어나도다"
[부안문화재답사-44] 보물 제900호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
종 목:보물 제900호  
명 칭: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 (扶安金氏 宗中 古文書 一括)  
분 류:기록유산 / 문서류/ 문서류/ 문서류  
수량/면적:일괄(6종80점)
지정(등록)일:1986.11.29
소 재 지:전북 부안군  
시 대: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김종덕

보안면 우동리에 터 잡고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부안김씨 문중에는 1502년(연산군 8)부터 1911년(융희 5)까지 400년 동안의 옛 문서 31종 609점이 소장되어 오고 있다. 내용은 대개 교지, 호적, 분재기, 토지문기, 노비문기, 소지, 시권, 간찰 등이다. 이 중에는 우동리 부안김씨의 현조 중의 한 분으로 손꼽는 해옹(海翁) 김홍원(金弘遠, 1571~ 1645)이 반계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으로부터 우반동 동변 일대를 사들이면서 작성한 매매문서도 있고, 김홍원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거나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받았던 합격증서와 임명장만도 32장이나 된다. 이러한 문서들은 당시의 사회경제사, 법제사, 국어분야, 전통문화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중에서 80점이 1986년 11월 29일 보물 제900호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로 지정되었다.


우반동 부안김씨 고문서 중의 하나로 반계 유형원의 할아버지 되시는 유성민이 김홍원에게 우반리 동변 일대를 팔면서 작성한 매매 문서이다. '證 長孫 學生 德彰' 학생 덕창이 이를 증했는데 덕창은 반계 유형원의 소년기 이름이다. ⓒ부안21



해옹(海翁) 김홍원(金弘遠)은 문정공(文貞公) 구(坵)의 후예이며, 교리(敎理) 석필(錫弼)의 증손이고,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경순(景順)의 아들로 부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588년(선조 21) 18세의 약관에도 못 미치는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3년 후에는 별시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초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달려가려고 하였으나 마침 조부상을 당한데다 부친마저 집상 중에 병환이 났기 때문에 계획을 포기하고 선유사(宣諭使) 윤승훈(尹承勳)을 통하여 군량미만을 행재소로 보냈다. 이 바람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으며 결국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또 복상 기간도 끝났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변산으로 피난 와 있던 사람들을 설득하고, 또 도내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당시 전라감사인 추포(秋浦) 황신(黃愼)에게 적을 막을 방책을 건의했다. 황신은 그를 크게 신임하여 그에게 왜군을 물리치도록 장사 수십 명을 주어 변산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게 했다.

그 후 김홍원은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에게 패하여 남쪽으로 퇴각하던 왜군을 순창에서 맞이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때마침 순천의 석보창에는 울산으로부터 퇴각한 왜군의 한 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는데 기세가 대단하였다. 그는 적진에 출입하는 백성을 시켜 적진 곳곳에 몰래 화약을 묻도록 하는 한편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들과 내통하여 전투가 시작되면 내응하도록 하였다. 또 날랜 군사를 매복시켜 도망치는 적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며, 어선 백여 척을 동원하여 뒤에서 후원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치밀하게 작전을 짠 후 한밤중에 전투를 시작하여 적을 모두 섬멸시켰다. 이때에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김홍원에게 그가 거느리는 군사 1,000명을 남원(南原)에 머무르도록 청하니 그는 바로 그 청을 들어 주어 그의 군사로 하여금 선봉이 되게 하였다. 이에 유정(劉綎)은 "이 사람이 참 장수다"라고 평했다는 말이 ⌜호남읍지(1790년 간)⌟에 기록되어 있다. 또 김홍원이 전장마다에서 적을 섬멸하고 승전하자 사람들은 의병장 곽재우와 견주어 ‘영남에는 곽재우, 호남에는 김홍원’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김홍원이 석보창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1958년(선조 31년) 조정에서는 그에게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이것은 전례에 없는 특별한 예우였다. 난이 끝난 뒤, 그는 전라도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제수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원주목사(原州牧使), 나주목사(羅州牧使), 회양부사(淮陽府使),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역임했다.

김홍원은 목민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왕으로부터 표리일습(表裏一襲) 즉, 겉옷과 속옷 한 벌을 하사받았다. 이와 관련된 유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금 어사가 올린 서계를 살펴보니 그대는 국가를 위하는 충성심이 깊고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가 뛰어나도다.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고 아전과 마주 치지 않도록 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고 토지가 모두 개간되었도다. 자신의 사사로운 일로 백성을 부리지 않는다고 하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이에 겉옷과 속옷을 한 벌 내리노니 그대는 이것을 받을지어다.”

이 유지는 선조 33년(1600) 4월에 내린 것으로 왕의 구두 명령을 승정원의 담당 승지가 직접 받아 적어 피명자에게 전달하도록 되어 있던 명령서이다. 김홍원은 당시에 전라도 금산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다.

선조는 왜란이 종식된 후 민심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어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민정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이 때 한음 이덕형과 백사 이항복이 연이어 어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삼남 지방의 민정을 샅샅이 살피고 돌아가 왕에게 서계를 올렸다. 이들은 모두 서계에서 김홍원의 치적에 대해 크게 호평을 하였다. 선조는 서계를 살펴본 후 유지를 내려 김홍원의 치적과 노고를 칭찬하고 ‘표리일습’을 내렸던 것이다. 왕이 신하에게 이와 같이 표리일습을 내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써 신하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광영이었다.


교지(김홍원을 통정대부로 임명함)ⓒ부안21


표리일습을 하사하노라(탁월한 목민관으로 인정받아 왕으로부터 겉옷과 속옷 한 벌을 하사받음)ⓒ부안21



그러나 김홍원의 관리로서의 삶이 그렇게 영광스러운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후에 그는 위의 평판과 전혀 상반되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사헌부 관원들은 그를 관직에서 파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나 주된 이유는 그가 황신과 가까이하였다는 점과 광해조에 벼슬살이를 하였다는 점이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정유재란 때 인연을 맺게 된 황신은 김홍원의 후견인으로서 그를 뒤에서 계속 돌보아 주었다. 황신은 정유재란 전란 기간 내내 김홍원의 의병활동을 여러 측면에서 지원하였고, 또 그가 승전을 하면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포상을 받도록 해주었으며, 전란이 끝나고 그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힘써 주었다.

이들의 인연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광해조에 들어와 황신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정협으로부터 무고를 당하여 황해도 옹진현으로 유배되자 김홍원은 정성을 다하여 황신의 유배 생활을 뒷바라지 하였다. 또 황신이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김홍원의 이러한 행동은 정권을 잡은 이이첨 등에게 미움을 받을 만한 빌미가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김홍원은 이이첨의 집권 기간 내내 나주목사와 담양부사 등과 같은 지방 수령직을 역임하고 충무위 부사용과 용양위 부사과 등과 같은 서반직을 두루 거쳤다. 이는 이이첨 세력으로부터 그다지 큰 미움을 받지는 않았기에 가능했을 터이지만, 반면에 김홍원의 목민관으로서의 자질에 하자가 없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줄포 잘동리에 있는 김홍원 묘ⓒ부안21



그 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김홍원이 처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이번에는 그가 광해조에 계속해서 벼슬살이를 하였다는 이유로 오히려 그를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이러한 일에는 항상 그러하듯이 사헌부와 사간원 등 대간의 관원들이 앞장을 섰다. 그래서 그가 회양부사에 임명되자마자 사헌부 관원들이 즉각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줄 것을 왕에게 강력이 요청하였으며, 왕은 이를 받아들여 그를 곧바로 파면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는 역모를 꾀하였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으며, 조사 결과 그가 역모를 도모한 사실이 없다고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조 7년(1629) 2월에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에 경상도 흥해로 이배되었다.

그가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3년 반 더 지난 63세 때의 일이었다. 그는 결국 인조 7년(1629) 2월부터 같은 왕 11년(1633) 5월까지 무려 4년 3개월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변산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해옹(海翁)이라 칭하며 시문을 즐기다가 1645년(인조 23)에 졸하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호조판서(戶曹判書)의 증직이 내리었다. 그의 묘는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 뒷산에 모시어져 있다. 그리고 그의 유고를 모은 ⌜해옹집(海翁集)⌟ 6권 1책이 전해지고 있다.<참고문헌: ⌜우반동-고문서를 통해서 본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전경목  저 (신아출판사)>

/허철희huh@buan21.com

 

 

 

 

코멘트 쓰기
코멘트 쓰기


비밀번호 확인 닫기